[소설] 선명, 김영주

선명

  시계방은 난로의 열기로 후덥지근했다. 나는 패딩을 벗어 밖에서 묻은 빗물을 털었다. 네이비색 장우산을 내려둔 바닥은 금세 흥건해졌다. 유리 쇼케이스 위에 패딩과 케이크 박스를 올렸다. 은영은 시계방 구석 오렌지빛 리넨 소파에 누워있었다. 나는 은영의 어깨를 흔들어 은영을 깨웠다. 은영이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하며 일어났다.
  “어, 최세진 왔냐.”
  “가게 문 열고 잠들어도 돼? 여기 금은방이랑 연결돼 있잖아.”
  “한 달 전에 쪽문 막아버렸어. 그러니까 할아버지도 나한테 가게 맡겼지. 아마 지금쯤 친구분들이랑 신나게 장기 두고 계실 거다. 치, 손녀가 할아버지 보고 싶어서 왔다는데.”
  나는 조금 웃었다. 할아버지가 보고 싶기는 무슨. 은영은 12월에 얇은 코트와 셔츠 한 장을 걸치고 있었다. 마지막이라며 도전한 신춘문예에 떨어져서 어머니께 잔소리를 듣는 장면이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것 같았다. 그런 운전 실력으로 용케 여기까지 왔네. 할아버지가 안 계시니 가져온 손목시계의 약을 갈아 끼우지는 못할 것 같았다. 나는 갈증을 느꼈고 열기를 뿜는 난로 쪽을 바라보았다. 패딩 안주머니에서 인공 눈물을 꺼내어 눈에 넣었다. 초점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항상 시야가 흐릿했다. 쇼케이스 너머에 열 개가 넘는 벽시계들이 있었다. 벽시계는 완전한 원형 대신 흘러내리거나 우그러든 모양으로 보였다. 꽃의 형태처럼 보이는 것도 있어서 속으로 ‘시계꽃’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은영이 나에게 케이크를 사 왔냐고 물었다. 나는 무슨 소리냐는 눈으로 은영을 쳐다보았다. 은영은 패딩 옆에 있는 케이크 박스를 가리켰다. 내용물은 케이크가 아니었다. 휴학 기간 목표해둔 미술 학원에 다니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렸다. 복학하면 제출할 과제를 미리 만들어둔 것이었다.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을 촬영하기 위해 배경이 될 세트장을 제작했다. 스토리 구상이 막막하여 우선 무대만 만들었는데, 그 작업도 쉽지는 않았다.
  “케이크 아냐. 최근에 만들기 시작한 거. 마땅하게 넣을 박스가 없더라고.”
  은영은 케이크가 아니라서 실망했다가 ‘최근에 만들기 시작한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했다. 케이크 박스를 열자 은영이 가까이 다가왔다. 초라한 중간 과정을 보여주는 것은 아무리 친한 친구여도 떨리는 일이었다. 성대에 이물질이 낀 것처럼 거북해서 침을 삼켰다. 은영은 이게 뭐지, 라는 눈빛을 무대에 쏘고 있었다. 일부러 내 쪽을 보지 않는다는 느낌도 들었다.
  “너 클레이 애니메이션 알지. <패트와 매트>, <월레스와 그로밋>, <코렐라인> 같은 거. 쉽게 말하면 그냥 인형극이야. 스토리에 따라 인형 소품이 1프레임씩 움직이는 걸 한 장 한 장 찍어두고 영상으로 만들면 되는데…… 아직 스토리를 못 정해서 가지고 나왔어. 나는 이상하게 비 오는 날 두뇌 회전이 잘 되더라.” 급히 부연 설명을 했다.
  “하나하나 찍는 거면 엄청 오래 걸리겠네.” 은영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비단 구상 때문에 밖으로 나온 것은 아니었다. 집에 있는 게 답답했다. 청소나 정리를 하지 않아 어지러운 방에는 앉을 곳이 책상 의자뿐이었다. 책상 의자에 앉으면 무언가 그리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림은 그릴수록 자괴감이 들었다. 그러면 고교 시절 일찍이 미술 학원에 보내주지 않은 부모님을 원망하게 됐다. 과제물을 발표하고 받는 피드백은 전부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그린 거냐’라고 들렸다. 안 좋은 소리를 들을 것을 예상하고 그게 또 현실이 되는 순간은 압박이 되었다. 그래도 꽉 막힌 방에서 책상 의자에 앉아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빠져들 수 있던 것이 점토를 만지는 일이었다. 집중력을 온통 쓰지 않으면 금방 실수했다. 그림을 그릴 때와는 다르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을 선택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림이 자신 없으면 노력으로 승부를 봐야겠다, 싶었다.
  시를 사랑하기까지 하는 은영이 부러웠다. 대학 진학을 하고 싶지 않다고 부모님께 말하는 용기가 부러웠고 미니멀리즘 스타일의 집도 부러웠다. 나는 그림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어디 가서 오오, 소리 듣고 살려면 대학에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나마 관심 있던 그림 쪽으로 진로를 잡은 것이었다. 그리고 비실기 전형이 있는 대학교 애니메이션 학과에 합격했다. 하지만 나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들 사이에 소속된 것 같지는 않았다. 어느 날에는 내가 독학치고 실력이 좋으니 다들 봐줘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다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의 스튜디오 현장을 전시회를 통해서 우연히 보게 됐다. 그림이 실력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그곳에서 처음 깨달았다. 그림이라는 분야에서 노력만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것도 있었다.
  “애니메이션 얘기하니까 중2 때 담임 샘 생각난다. 그, 스승의 날에 반장이 애들 돈 모아서 캐릭터 그려진 향수 샀잖아. 담임 샘이 책상에 덕지덕지 붙여놓은 거 보면 그 캐릭터 좋아하는 것 같다고. 그래서 선물한 건데 막 자기한테 냄새나냐고, 되려 짜증이나 냈잖아.” 은영이 말했다.
  “어어, 기억나. 그래서 애들 표정 완전 썩었었지. 물론 그 뒤에 고맙다고 하긴 했지만…… 사춘기 애들한테 그런 뒤늦은 수습이 통했겠냐.”
  나는 은영과 중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의 히스테리를 주제 삼아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눴다. 그럼에도 중학생 시절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은영 또한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우리는 잠시 같은 얼굴을 했다.
  “케이크 박스 계속 보니까 안 되겠어. 점심 먹고 디저트 가게 가자!”
  은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패딩을 입고 케이크 박스를 들었다. 은영이 시계방 열쇠를 잘그락거리며 문을 잠갔다. 멋대로 가게 문을 닫아도 되는 거냐고 묻자 어차피 손님도 없다고 했다. 밖은 아까보다 빗줄기가 거세져 있었다. 돌풍까지 불었다. 창문에는 빗방울이 흘러내려 시계방 내부 벽시계들이 블러 처리된 것처럼 형태만 보였다. 근처 음식점에는 주차장이 없어서 걸어가기로 했다. 은영의 차에서 멀미로 고생하느니 걷는 게 백번 나았다. 나는 은영에게 춥지 않냐고 물었다. 대충 괜찮다는 사인이 돌아왔다. 은영은 바람 때문에 잘 안 들리는 순간에도 중학교 때가 어땠었는지를 얘기했다. 중학교는 우리가 심심할 때면 열어보는 보물 상자의 존재가 됐다고 생각했다. 혼자 회상하면 재미없는 어린 시절이지만, 은영과 함께라면 시너지를 발휘했다.
  생크림 케이크를 먹고 우리는 조금 걸었다. 은영이 사는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나는 중학생 시절 급식을 먹고 소화할 겸 학교 한 바퀴를 돌았던 얘기를 하며, 은영에게 산책을 권했다. 은영의 아파트 동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내리막길을 걸었다. 쓰레기로 인해 매캐했던 동 입구와 달리 산책로에서는 풀 내음이 진하게 풍겼다. 향기를 힘껏 맡았다. 뒤에서 어린아이가 가장자리에 물이 고이는 것이 계곡 같다며, 내리막길과 평지가 만나는 곳에는 물이 엄청 흐르겠다고 말했다. 어린아이의 엄마는 웃으면서 맞장구쳤다. 나도 맞장구치고 싶었다. 풀이 많은 계곡에는 이런 냄새가 날 것 같았다.
  평지 쪽에는 조형물이 많았다. 아스팔트 양옆으로 흙을 깔고 그 위에 조각상이나 조형물을 세워두었다. 한 조형물은 석조상이었다. 소년의 두상을 나타낸 석조상은 왼쪽 얼굴이 없고 오른쪽 얼굴만 존재했다. 소년의 오른편에서 혼자 구리로 만들어진 소녀가 두드러졌다. 소녀는 소년에게 귓속말했다. 소년은 소녀의 말만 듣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귀를 기울인 비스듬한 자세였다. 나는 소년의 반쪽 얼굴과 소녀의 옆모습을 차례대로 보았다. 정면에서는 볼 수 없는 소녀의 오른쪽 얼굴이 궁금했지만 질퍽거리는 흙을 밟기가 꺼려졌다.
왜인지 그날이 떠올랐다. 성인이 되기 전, 일 년에 한두 번은 꼭 아빠와 싸웠다. 그날이 가장 크게 싸운 날이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아빠와 싸운 적은 없었다.
  그때 우리는 사이좋게 지내다가도 사소한 말다툼으로 싸움을 시작했다. 그날은 아빠가 엄마의 저녁 요리를 이것저것 폄하하기에 그냥 좀 먹으라고 한마디 거들었었다. 아빠의 입을 막으려는 시도였다. 한마디가 아빠의 신경을 건드릴 줄은 몰랐다. 그때의 아빠는 화를 잘 참지 못했다.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치며 큰소리를 냈다. 나는 최대한 겁먹지 않은 척, 자연스레 대응했다. 화난 상대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짓이었다. 그럼에도 말을 하기 시작하면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지은영, 그 녹음본 아직 갖고 있어? ……나 아빠랑 싸웠을 때, 너한테 전화했잖아.“
  그다음 날 은영과 약속이 있었다. 엄마는 소리치는 아빠를 진정시켰다. 둘은 안방으로 들어가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울음을 그치고 생각했다. 마음을 가라앉힐 겸, 약속을 취소할 겸 해서 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은영이 전화를 받는 순간 안방에서 아빠가 나왔다. 나는 핸드폰을 숨기고 은영이 대답하지 않기를 바랐다. 혹여 대답하더라도 그 대답이 아빠에게 들리지 않기를 빌었다. 겨우 그친 울음이 다시 흘러나왔다.
  “……응, 네가 지우라고는 했지만…… 혹시 필요할 수 있으니까. 너희 아버지, 평소에는 젠틀하신데 그날은 조금 무섭더라고. 너는 울지, 나는 자다 깼지, 진짜 깜짝 놀랐다, 야. 대충 상황 파악하고 사과하는 목소리 들리길래 그나마 전화 끊은 거야.”
  “……그날 아빠가 사과했었다고?”
  처음 듣는 얘기였다. 은영이 서둘러 녹음 파일을 틀었다. 앞의 상황은 듣고 싶지 않아서 마지막으로 건너뛰었다.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아빠는 요즘 자신의 들쭉날쭉한 감정 변화를 설명하며 미안함을 전했다. 생전 눈길 한번 주지 않던 심리학책까지 읽으면서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는 중이라 했다. 섣부른 판단을 내려서 부끄럽고, 무작정 화내는 화법을 고치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우느라 대답하지 않았다. 녹음본은 거기서 끝이었다. 제대로 못 들었기 때문에 기억을 못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정말 못 들은 것인지,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를 자동으로 헤아리게 됐다. 은영은 내 눈치를 슬쩍 보다가 처음 알았냐고 질문했다. 나는 은영이 듣지 않도록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못 들은 거야. 괜찮아.” 은영은 내 어깨를 토닥거렸다.
  “아무리 이걸 들어도, 그래도…… 그 일에 대한 용서는 못 하겠어.”
  은영이 동조하는 표정으로 까닥였다. 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용서는 못 해도 사과에 알았다는 답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 부모님은 내게 거의 모든 것을 맞춰주었다. 돌이켜보면 그 일이 있기 전에도 똑같았다. 그래서 인생의 절반을 그때 부모님이 이렇게 했다면 지금의 나는, 따위를 상상하며 보냈다. 나는 그래도 내가 나름의 정의와 평등을 추구하며 산 줄 알았다. 그게 내 인생의 몇 없는 자부심이기도 했다. 나는 자식이 부모에게 자유로운 의견을 표출할 수 있도록 수직적 관계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관계를 수직적으로 만들고 있던 건 나였을지 몰랐다. 어릴 적 부모님이 다투면 나는 그동안의 불화가 전부 서프라이즈였고, 사실 부모님은 금실이 무척 좋다는 진실을 누군가 알려주길 바랐다. 그리고 그 당시 겪었던 공포심을 이용해서 관계의 우위를 점령하고 싶어 했다.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고 나서 내가 가장 먼저 걱정한 것은 은영과의 침체된 분위기였다. 충격적인 사실을 뒤늦게 알았지만,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잘못한 일은 잘못한 일이었고 그에 대한 사과는 분리되어야 했다.
  은영은 내 표정이 침울했는지 끊임없이 말을 걸며 나를 돌아봤다. 나는 잠시 그날의 생각을 멈췄다. 멀리서부터 새의 울음이 울려 퍼졌다. 며칠 전 밤을 새우고 새벽녘에 들은 새소리 같았다. 짧은 시간 동안 마음이 편안해졌다. 은영이 내 어깨를 툭툭 치고 저기를 보라며 손가락을 들었다. 그곳에는 정자가 있었는데 주위에 고양이가 어슬렁거렸다. 주황색 고양이는 흙을 파다가 나무 위 까치의 목청 좋은 울음소리에 놀라며 자리를 떠났다. 비가 왔을 때 젖어서 축축해진 패딩과 슬랙스가 무거웠다. 추운 기운은 겨울비의 끈끈함으로 인해 조금 눌러졌다. 패딩을 벗으니 니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이 꽤 시원했다. 나는 한결 쾌적한 마음으로 산책을 끝냈다.
  은영을 동 앞까지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갔다. 패딩을 다시 입으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고치려고 가져온 손목시계가 걸리적거리다 잡혔다. 나는 약이 떨어져서 멈춰버린 시계를 한참 지켜봤다. 평일 초저녁 시간대의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일 반드시 방을 치우고 닦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매번 결심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게 일상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말 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나는 케이크 박스를 열어 무대를 꺼내고 책상 위에 있던 점토를 조몰락거렸다. 머릿속을 환기하기 위해 아무렇게나 만진 점토는 케이크 모양이었다. 나는 기왕 이렇게 된 거, 케이크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색연필로 콘티를 그렸다. 우선 과일 가족 중 막내는 케이크를 먹고 싶어 한다. 둘째와 셋째는 케이크를 직접 구우려다 부엌을 엉망으로 만들고 실패한다. 첫째는 부엌에서 난 소리에 놀라며 잠에서 깨고 둘째와 셋째를 혼낸다. 결국 첫째가 레시피를 가르쳐주며 셋은 케이크를 완성한다. 자고 일어난 막내는 케이크를 보고 가족을 꼭 껴안는다.
  나는 점토로 첫째 참외와 둘째 복숭아, 셋째 사과, 막내 딸기를 만들었다. 표정을 쉽게 바꿀 수 있도록 눈과 입을 여러 개 만들어두었다. 창문을 보니 해가 지고 있었다. 아빠 특유의 도어록을 여는 급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현관 앞으로 달려갔다. 자연스럽게 천천히 나온 척을 했다. 입술을 부르르 떨며 침착하게 안녕, 이라고 말했다. 맥박이 빨라졌다. 수많은 인사 중에 하필 안녕이 뭐야! 생각하다가 혀를 깨물어서 인상을 구겼지만 아빠는 당황도 잠시 인사를 받아주었다. 얼떨떨해 보였다. 나는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원래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은 주로 팀 작업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혼자서 완성하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 이렇게 어려운 걸 혼자 하다니, 대단하군. 나에게 주는 칭찬이었다. 서랍에서 디지털카메라를 꺼냈다. 책상에 미니 삼각대를 세우고 카메라를 두었다. 영상에 넣을 사진 하나하나 밝기가 다르면 어색해 보이니 휴대용 LED 조명을 책상에 놓고 고정했다. 햇빛이 들어오지 않도록 암막 커튼을 쳤다. 디지털카메라의 노출값을 자동에서 수동으로 바꾸고 고정값을 지정했다.
  사흘 밤을 통째로 새우며 십오 초짜리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영상을 완성했다. 영상을 완성한 즉시 은영에게 전송했다. 은영은 아침 일찍 답장을 주었다. 답장은 칭찬으로 가득해서 두 번 읽기 민망할 정도였다. 은영의 마지막 메시지에 시계방을 한번 들르라는 말이 있었다. 나는 점심때까지 낮잠을 자다가 비몽사몽 시계방으로 향했다. 은영은 카운터에서 나를 반겼다.
  “자, 이거. 작품 완성 기념 선물.” 내가 인사도 하기 전에 은영이 굵은 리본으로 정갈하게 포장된 선물 상자를 내밀었다.
  “시계네? 비싼 거 아냐?” 나는 상자의 뚜껑을 열고 놀라며 물었다.
  “으응, 우리 할아버지가 가게 봐줘서 고맙다고, 손녀 시계 하나 해주신대서 제일 괜찮은 걸로 골랐어.” 은영은 거짓말을 하는 게 분명했다. 이런 낡은 시계방에 최근 유행하는 스타일의 시계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걸 왜 나한테 줘. 네가 가져야지.”
  “나는 손목 불편해서 어차피 못 써. 그리고 너 시계 약 다 됐지? 이참에 바꿔라.”
  “약이 다 됐다고 시계를 바꾸는 사람이 어디 있…… 어휴, 알겠어. 받는다, 받아. 쯧. 할아버지한테 꼬옥, 감사하다고 전해드려라? 어?” 받지 않으면 밤새 우길 기세길래 선물 상자는 주머니에 넣고 시계는 손목에 찼다. 은영이 자꾸 빙글빙글 웃었다.
  “너 시계 좋아했잖아. 맘에 드는 시계 있으면 무조건 사서 모으고. 다 차지도 못하면서. 암튼 저기, 교보문고 지나다가 사 온 거야.”
  나는 손목을 돌리며 시계를 구경했다. 남색의 가는 시곗줄과 은색 유광 시계틀은 조화를 이루었다. 작은 입자의 펄이 새겨진 오묘한 미드나잇 블루 시계판이 어딘가 모던한 느낌을 줬다. 시계판에 별처럼 박힌 작은 큐빅 열한 개는 숫자를 대신했다. 열두 시만 로마 숫자로 표기되어 있었다. 계집애, 내 취향을 정확히 알았다. 우리는 세 시쯤 늦은 점심을 먹었다. 은영이 케이크를 먹고 들어가자며 졸랐지만 애니메이션을 만드느라 케이크는 지겹도록 봐서 거절했다.
  우리는 시계방의 리넨 소파에 앉아서 대화를 나눴다. 은영은 케이크 못 먹은 대신이라며 코코아를 내왔다. 코코아가 담긴 종이컵을 감싸 쥐자 손이 뜨뜻해졌다. 우유 대신 물을 탄 코코아는 싱거웠지만 먹다 보니 입맛에 맞았다. 앞으로 코코아를 탈 때는 물을 넣어 먹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은영은 언제까지고 이렇게 잘 수는 없으니 조만간 네 집에 가야겠다고 선포하듯 말했다. 나는 방을 치워뒀으니까 언제든 오라고 일렀다. 우리는 둘 다 편하게 눕는 걸 좋아했으므로 적어도 누울 수 있는 장소에서 만나기를 선호했다. 너네 집은 아직 안 될 것 같지, 하고 물었는데 엄마 때문에 집에도 못 들어간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뜨악하며 며칠 전 데려다줬을 때는 어떻게 들어갔냐고 묻자 은영은 현관문을 열기가 두려워 시계방에서 잤다고 했다. 나는 짠하네,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은영이 의기양양하게 괜찮아, 라는 얼굴을 했다. 시계방은 난로 때문에 쉬이 건조해졌고 동시에 내 눈도 텁텁해졌다. 나는 핸드백에서 안경집을 꺼냈다.
  “아 맞다, 나 저번 주에 안경 샀어. 몰랐는데 내가 안구 건조증에다 시력도 짝짝이래. 어두운 곳에서 핸드폰 많이 보면 그렇게 된다더라. 시력 좋은 한쪽이 안 좋은 쪽 따라 저하되고 있어서 조금이라도 늦추려면 안경 맞추라고 하데?” 투명 뿔테안경을 쓰면서 말했다.
  “요즘 그런 사람들 많아. 특히 어린애들. 안경 처음 쓰는데 시력 차이 심하면 양쪽 눈 도수 똑같이 맞춘 것보다 더 어지럽대.”
  “아, 어쩐지. 어지러운 게 5일이나 가더라.”
  나는 안경테를 잡고 눈에서 가깝게 했다가 멀리 보냈다가 움직이면서 안경을 쓰면 얼마나 잘 보이는지 체크했다. 눈의 해상도를 높였다가 낮추는 것 같아서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은영은 또 왜 저래, 라고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일어나서 유리 쇼케이스 쪽으로 걸었다. 벽시계들이 전부 같은 시각을 가리켰다. 안경을 써서 전보다 뚜렷하고 선명하고, 맑게 보였다. 난로로부터 조금 떨어지니 더 시원한 공기와 맞닿을 수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시계꽃’의 형상을 그려보았지만 그때 본 만큼 똑같이 상상하지는 못했다. 결국 눈을 떠서 깨끗하고 밝아진 시계를 바라보았다. 열 개가 넘는 벽시계들은 마음을 고요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근데 안경 쓰기 시작하니까 점점 의지하게 되는 것 같아. 안경 안 쓰면 제대로 보는 것 같지도 않고.” 나는 걱정스러운 투로 털어놓았다.
  “그동안 눈이 무리하고 있었나 보지.”
  은영은 간결한 추론을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내세웠다. 나는 은영을 아파트까지 데려다주려고 했지만, 은영은 오늘도 시계방에서 자겠다고 했다. 반쯤은 농담조인 줄 알았는데 작은 것 하나조차 허투루 말하지 않는 은영이었다. 나는 은영 없이 은영의 아파트 조형물을 다시 보러 갔다. 쌀쌀한 바람이 불어서 오래 있지는 못할 것 같았다. 금빛 소녀가 미약한 햇살에 반짝이며 귓속말했다. 푸석해진 흙을 밟고 소녀의 오른쪽 얼굴을 확인했다. 별건 없었다. 그래도 소녀의 얼굴이 반 잘려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소녀의 뺨에 손바닥을 대고 살짝 쓰다듬었다. 감각을 더 잘 느끼기 위해 눈을 감았다. 소녀는 차가웠다. 손이 얼기라도 할 것처럼 빨개졌다. 나는 한참 있다가 손을 떼고 아파트 출구를 향해 걸었다. 한동안 손에서는 쇳내가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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