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담긴 건 무엇이었을까

권보현

  희지는 도망쳤다.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누군가를 두고 홀로 떠나는 일은. 그녀는 거의 남겨지는 입장이었다. 등을 보이는 일보다 보는 쪽이 익숙했다. 희지의 삶은 단조로웠다. 적당한 사랑 아래 자랐고 집 근처 대학에 진학했으며 연애는 한 손에 꼽을 만큼 해본 사람. 물론 취업 준비를 하던 차에 덜컥 아이를 가지게 된 사연은 비범한 축에 속할지도 모른다. 미혼모라는 별칭이 하나 붙었지만, 그래도 무난한 인생이었다. 우리네 주변에 한 명쯤은 있을 법한 여자. 아줌마들 사이에서 참으로 가여운 사람. 그렇게 불쌍하지는 않아도 동정 어린 시선을 곧잘 받는 축의……. 이만 각설하고 정리해보자면. 희지는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딸로부터 버림받지 않기 위해 먼저 딸을 버렸다. 첫 새치기는 아주 짜릿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딸, 이한이 열아홉 살이 되던 해에 다짐했다. 먼저 떠나야지. 이한이 희지를 특별히 싫어했다거나 집을 싫어한 건 아니었다. 희지는 이한이 떠나는 모습을 보는 일에 적응하기 싫었다. 희지는 수능 날까지 자신의 도주를 상상했다. 혼자 집에 남겨질 딸에게 미안했다. 그렇대도 다짐을 무를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매일매일 도망을 상상했다. 여유롭다는 생각이 들 때면 홀로 모르는 지역을 누비는 자신을 떠올렸다. 상상은 점점 구체화되고, 희지는 고집이 하나 생겼다. 일전에 티브이에서 본 적도 없을 법한 동네에 가고 싶었다. 그래서 무궁화호나 KTX가 아닌 버스를 타기로 결심했다. 호기롭게 탑승했던 때와는 달리 희지는 숨을 헐떡였다. 렌터카는 선택지에 없었다. 괜찮은 시설도 마땅치 않았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희지는 장롱면허였다. 그녀는 결국 뚜벅이 신세를 면치 못했다. 터미널 근처에는 작달막한 정류장이 있었다. 사실 근처라고 하기엔 발바닥이 아플 만큼 걸어야 했지만 괜찮았다. 그녀는 이십사 인치짜리 캐리어를 끌고 이 킬로미터를 걸었다. 희지의 안짱다리 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땀이 흘렀다. 가슴 아래로 땀이 찼다. 시큰해지는 무릎과 후끈한 발바닥을 무시하기 힘들어질 때쯤 조그만 정류장이 나왔다. 그녀는 노란색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는 지나다니기만 할 뿐 정차하지 않았다. 희지를 지나치는 버스 기사들은 그녀를 훑어보기만 했다. 널따랗고 두툼한 양감의 휴대전화는 신호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5년이 넘도록 쓴 스마트폰은 기분 내킬 때만 제 기능을 했다.
그녀는 평소 자신이 검소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웃돈을 얹어서라도 그 정류장에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발바닥이 아렸다. 희지는 한참 동안 손을 휘저었다. ‘요이―땅!’과 같은 말을 곱씹으면서. 위아래로 움직였다. 희지의 휴대폰이 더운 날씨를 이기지 못하고 방전되었을 무렵 택시 하나가 정류장 앞에 멈추어 섰다.

  택시 기사는 말이 많았다. 자신의 정보를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 이름, 나이, 왜 이 일을 하게 되었는지, 가족 구성원이 누가 있는지를 알려주었다. 희지는 웃으며 받아쳤다. 습관이었다. 기사는 핸들을 검지로 두드리며 목을 가다듬었다. 자신을 춘복 씨라고 부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창문을 열었다, 그녀는 짧게라도 대답해주는 희지가 썩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조금 늦은 질의응답 시간이 찾아왔다. 어디 가시려고요? 잘 모르겠어요. 행선지를 정하지 않은 그녀에게 잘 아는 민박집이 있다며 운전대를 꺾었다.
  춘복의 추천으로 도착한 민박집에서는 투박한 바다 기운이 물씬 풍겼다. 춘복은 트렁크에서 짐을 내려주면서도 민박집의 칭찬을 늘어놓았다. 물론 희지는 잠자리 눈알 같은 선글라스를 코에 얹은 기사가 말 거는 게 성가시다고 느꼈더랬다. 더군다나 그녀는 택시 기사가 주변을 빙글빙글 도는 바람에 삼천 원 정도 손해 봤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녀는 바닷바람이 주는 싱그러움에 기분이 꽤 좋았다. 그녀가 추천해준 민박집도 정겨웠다. 덕분에 바가지는 단순한 액땜인 척 할 수 있었다. 희지는 손바닥을 보이며 팔을 내밀었다. 흰 팔뚝에 볕이 닿았다. 뜨겁기만 했다. 햇빛도 지역마다 세기가 다른 것일까. 택시가 언덕길을 내려갔다.

  그녀의 첫 도피처는 ‘롬’이라는 지역이었다. 바다가 있고, 짬뽕이 유명한 관광명소에서 차로 20분 정도 달리면 나오는 마을. 거리가 있어 발달이 더딘 덕분인지 민가는 정겹게 느껴질 만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희지는 택시에 가방과 캐리어를 실을 때부터 민박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오 분만 더 가면 모텔이나 호텔 정도에서 묵을 수 있대도 그랬다. 춘복의 추천을 거절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싸구려 콘돔과 일회용 세면도구는 필요하지 않았다. 더 솔직히는 고층 건물에 올라가서는 안 되었다. 후회할 결정을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후회할 만한 결정은 설마, 하는 그게 맞다. 높은 곳에 있을 때면 불쑥 찾아오는 충동을 막을 여유가 없었다. 현재 희지의 판단으로는 그랬다.
  ‘자유 민박’ 굵고 붉은색 굴림체로 쓰인 ‘민박’이라는 글자는 그녀에게 왠지 모를 든든함을 주었다. 푸른 지붕의 민박집 주변에는 널찍한 평상, 작은 수돗가, 커다란 삼각팬티와 브래지어, 미역이 같이 걸린 빨랫줄이 있었다. 희지는 눈을 굴리며 신원 불명의 사장님을 찾았다. 계시냐는 물음에는 오른쪽 귓가에서 답이 들려왔다. 누그여. 한 손에는 사시미 칼, 다른 손에는 광어 꼬리를 쥔 여성이 등장했다. 그녀는 키가 큰 편은 아니었지만 살집이 있었다. 검은 민소매에 청색 멜빵바지를 입고 무릎 장화를 신은 모습은 작은 키가 무색하게 건장해 보였다. 희지는 뒤돌아 보자마자 알았다. 이 사람이 사장님이다. 아마 희게 세었을 머리를 보라색으로 염색한 할머니가 껄렁하게 몸을 흔들었다. 희지는 딸, 이한이 옷차림을 뽐낼 때마다 듣고 싶어 하던 말 중 하나를 기억해냈다. ‘힙하다’ 민박 사장님은 힙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이한이 어떤 마음으로 이를 선망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사장은 자신을 형자라고 소개했다. 그리고는 캐리어를 번쩍 들어 올렸다. 희지를 쳐다보며 고개를 살짝 꺾어 보였다. 희지는 홀린 듯이 형자를 따라 민박집 안으로 들어갔다. 형자는 가장 안쪽 작달막한 방을 내주었다. 화장실은 나가서 오른쪽, 내 방은 저 짝, 손가락으로 주방 옆을 가리켰다. 희지도 모르게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식사는 하실 거냐”는 반말인지 존댓말인지 모를 질문은 손가락이 접히며 따라왔다. 아니요, 괜찮아요. 희지는 그녀의 옹송그린 주먹이 참 야무지다는 생각했다. 희지는 힙한 사장님과의 겸상을 편히 여길 만큼 대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형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쉬라며 문을 닫아주었다. 느리고 조용하게 문이 닫혔다. 방을 훑어보며 바닥을 손으로 쓰다듬던 그녀는 대번에 드러누웠다. 이불도 깔려있지 않았고 침대는 더더욱 없었지만, 구들은 더없이 따끈했다. 여독을 풀 시간이었다.

  바깥은 제법 어두워져 있었다. 희지는 납작한 배를 문지르며 카디건을 걸쳤다. 민박집에서 조금 걸으면 보이는 슈퍼에 다녀올 생각이었다. 간단한 주전부리와 버드와이저가 있기를 바랐다. 캐리어에서 꺼내 온 가벼운 슬리퍼를 꿰어신었다. 평상에 누워 담배를 태우는 보라색 머리의 사장이 보였다. 왼편에는 흰 바탕에 붉은 뚜껑을 얹어놓은 것 같은 담뱃갑과 형광 라이터가 들려있었다. 다채로웠다. 보라색에 빨간색과 흰색, 형광까지. 형자는 희지의 존재를 아는지 모르는지, ―알든 모르든 희지는 고려 대상이 아닐 것 같았지만― 그녀는 입을 동그랗게 말고 호흡을 뱉어내고 있었다. 동그란 튜브가 공기 중에 떠다니다 곧 흩어졌다.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도넛이었다. 예쁘지는 않아도 또 보고 싶어졌다. 희지는 흡연자가 아니었지만, 특별한 거부감은 없는 편이었다. 담배 연기가 만들어낸 구름이 하늘로 올라가면 뭉게구름이 될까, 먹구름이 될까, 하는 엉뚱한 상상도 종종 해왔고.
  사장은 희지를 흘깃 쳐다보더니 재떨이에 담배를 뭉갰다. 장초였는데. 희지가 아까워하며 작게 말했다. 형자는 비어버린 손을 휘휘 저었다. 사장님은 식사하셨어요. 잠긴 목소리에도 사장은 그 말을 용케 알아들었다. 아직, 다이어트 중. 아……네, 다녀올게요. 대화가 끝났다.
  이 동네에서는 편의점에 가려면 십오 분 이상 걸어야 했다. 당연히 희지는 오 분 거리의 ‘수퍼’를 택했다. 형자가 전해준 바로는 오 분이었지만, 사실 십 분 가까이 걸리는 것 같았다. 희지는 팔을 문지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겨울의 바닷바람은 코가 시큰하도록 차가웠다. 심지어 밤이라 눈에 뵈는 것도 한정되어 있었다. 가로등이 띄엄띄엄 있었다. 자는 동안 충전해 둔 휴대전화 플래시에 의지한 채 종종걸음으로 내려갔다. ‘흰 수퍼’는 이름값과 다르게 누렇고, 퍼렜다. 알루미늄의 미닫이문을 열었다. 신경을 자극하는 소리가 들렸다.
  희지는 그토록 원했던 맥주와 주전부리 몇 가지를 집어 매대에 올렸다. 그리고 계산하는 직원의 얼굴을 보고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희지야. 다른 목소리가 하나의 말을 뱉었다. 임희지의 앞에는 고향 친구 김희지가 있었다.

  그들은 간단한 안부를 물었다. 웃으며 말을 주고받다가 자연스레 이야기가 깊어졌다. 슈퍼 앞 테이블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초등학교, 중학교 그리고 대학교―물론 과는 달랐다―까지 같이 나왔음에도 졸업과 함께 연락이 끊겼던 그들이었다. 서로가 차지하지 않은 시간이 길었기에 할 말은 차고도 넘쳤다. 당차고 우스갯소리를 잘하던 희지는 여전히 유쾌했다. 그래서인지 스스럼없이 자신이 ‘짝 가슴’이 되었다는 파격적인 토픽을 던질 수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취업도 하기 전에 이한을 보게 된 희지와 달리 희지는 졸업 전 취업에 성공했다. 하지만 첫 취업의 환희와는 다르게 IT 회사는 그야말로 ‘개구렸다’. (희지의 말을 빌렸다) 기술의 보급을 도모하면서도 인권의 발전은 안중에도 없었다. 여성이 마주하는 부당한 처사가 당연한 곳이었다. 그녀는 퇴사를 염원했다. 그녀의 어깨는 안으로 말렸고 거북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랜 시간 앉아 있는 탓에 허리도 지끈거렸다. 가슴이 답답하고 체하는 일도 늘어만 갔다. 그녀는 재취업을 알아보았다. 여기만 아니면 될 것 같았다. 1차 서류 결과가 좋았고, 거의 다 왔노라고 생각할 때쯤 디자인 부서에서 지금은 ‘구 예비 신랑’이 된 그를 만났다. 재취업은 자연스레 기각되었다. 2년간의 열애는 결혼으로 막을 내리려 했다.
  구 예비 시어머니의 권유로 하게 된 건강검진에서 유방암이라는 진단이 나오지 않았으면 그랬을 터였다. 단순히 항암만으로 치료할 수 없다던 의사는 유방 전절제술을 권했다. 당연히 결혼은 취소되었다. 구 예비 시어머니는 아들에게 가슴이 하나뿐인 며느리를 얻지 않게 된 것을 천운이라 말했다. 희지를 사랑했던 그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이런 걸 ‘모전자전’이라고 하던가. 진단명이 별칭이 되어 유방암 환자 58181818이 된 희지에게 수술의 방법이나 예후에 관해 물을 겨를은 없었던 그는 핑계도 없이 헤어지자는 말을 전했다. 희지는 이미 그 말이 나오리란 것을 알았다. 이유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지만 알았다. 알 수밖에 없었다. 이별의 순간마저 그 새끼는 희지의 가슴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김희지는 말했다.
  “너 그거 아니, 가슴을 떼어낸 곳은 평평하지 않아. 달의 크레이터마냥 움푹 패어 있어. 다행이랄 건 없지만 다행인 건 항암치료가 죽을 듯이 아파서 파혼당한 건 안 아팠어. 처음엔 실리콘이라도 넣으려고 했는데, 비참하더라. 고작 가슴이 뭐라고 플라스틱이며 멀쩡한 살을 옮겨가며 채워야 하니. 됐다 그래, 뭐 이제는 브래지어 스펀지가 내 가슴 같아.”
  그녀는 한 손을 들어 오른 가슴을 꾹 눌렀다. 처음부터 비어있던 것처럼 누르는 대로 들어갔다. 희지는 가슴을 문질렀다. 결국 IT 회사를 나와 이모가 하시던 ‘흰 수퍼’에 눌러앉았다는 말을 얹으며 맥주를 마셨다.
  “흰 수퍼라면서 희지 않은 슈퍼나, 가족 같은 분위기라면서 가 족같은 회사나 앞뒤 안 맞는 건 똑같지 않니.”
  희지는 웃었고 희지는 뿌듯했다. 희지는 각주 같은 말을 좋아했고 참 잘했다.

  희지와 희지는 깔깔대기도 하고 숙연해지기도 하며 한참을 대화했다. 그녀가 샀던 과자와 맥주 여섯 캔이 동났을 때쯤 희지들은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별이 잘 보였다. 시선을 내리면 바다 위 윤슬이 보였다. 희지는 지금이라면 하늘과 바다가 꼭 맞물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희지는 번쩍번쩍, 콰과광, 소리가 나면 좋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하늘과 바다의 연결, 빛으로 이루어진 기둥을 보면 왠지 쾌감이 느껴질 것도 같았다. 김희지는 지구과학을 사랑한 공대 출신이었던 것을 뽐내기라도 하는 듯 잘 움직이지 않는 혀로 별자리를 설명해주었다. 영문과를 나왔던 임희지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희지는 자기 가슴을 쳐다보며 노크를 하듯 퉁퉁 쳤다. 트림이 불시에 나왔다. 언젠가부터 그녀는 가슴의 쓸모를 잃었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까짓 지방 덩어리가 뭐라고. 희지는 맥주를 마시면서 고민했다. 늘어버린 걱정과 불평 때문인지 오랜만에 비운 맥주 캔 때문인지 복수의 지방이 쪼그라든 것만 같은데. 이건 나이의 복수일까. 희지는 혼자 웃었다. 낄낄낄. 어쩌면 한 쪽이 구덩이가 되어버린 가슴보다 비어있는 건 아닐까. 가슴을 꾹 눌러보았다. 살덩이는 여전했다.
  둥그런 지방 덩어리 두 개를 감싸는 속옷은 불편하고 비싸기까지 하다. 희지는 이제 브래지어의 수명에 대해 생각했다. 마침 속옷 갈이를 할 때가 된 탓이었다. 희지는 이 도망의 끝을 계획하지는 않았지만, 어렴풋이 알았다. 이후 애써 지워왔던 이한에 대한 걱정이 커졌다. 부풀고 늘어나고 쳐졌다. 여행을 왔기 때문이었다. 민박집이 따듯했기 때문이었다. 술을 마셨기 때문이었다. 밤하늘이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서러웠다. 희지는 이한을 지워낼 수 없었다. 희지는 더 많은 별을 담기 위해 눈을 굴리며 생각했다. 거창했던 도피는 고작 브래지어 때문에 끝날지도. 한때 별명이 펠레였던 희지의 추측이었다.

  형자는 희지가 돌아올 때까지 평상에 누워있었다. 담배를 피우고 있지는 않았지만. 오징어포를 씹고 있었다. 입 냄새가 많이 나는 걸 좋아하시는구나, 커피도 좋아하실까. 희지의 알코올 향 섞인 궁금증은 담배 연기를 닮았다. 어느 구름이 될지 모르고 공기 중에 흩어졌다는 소리였다. 희지가 삐뚠 걸음을 옮기자 버드와이저가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형자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얼마나 웃기게 걷는지 궁금한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희지는 어디 하나 깨지는 곳 없이 평상에 앉을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희지의 비닐봉지를 뒤적이던 형자는 오징어포를 내밀며 “콜?” 하고 물었다. 희지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형자의 오징어를 잡아챘다. ‘다이’를 할 정신머리가 없었던 희지 덕에 자유 민박 평상에서 난데없는 술자리가 벌어졌다.
  형자는 비, 유, 디, 더블유, 이, 아이, 에스, 이, 알을 손가락으로 그렸다. 이건 뭐라고 씨불여요? 반말인지 존댓말인지 모를 질문이 또 나왔다. 희지는 꼬부라진 혀로도 친절했다. 버얻와이절요. 버드와이저어. 형자는 꼬부라진 말속에서도 한국식 발음을 잘도 찾아냈다. 단숨에 삼백오십오 밀리의 반쯤 되는 양을 들이켠 그녀는 작게 별거 없네, 하고 중얼거렸다. 형자는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냈다. 말보로 레드, 그녀가 평상에서 태우던 담배였다.
  잠깐 멈칫한 형자는 희지를 쳐다보았다. 비흡연자에게 흡연자가 감히 이것을 태워도 되는지 묻는 의식이었다. 희지는 흔쾌히 손바닥으로 풍선을 띄우는 듯 올려 보이며 ‘얼마든지요’ 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고맙수. 담배를 물고 끄덕이던 형자는 뜬금없이 질문을 던졌다. 영어 잘해요? 완벽히 존댓말에 해당하는 질문이었다. 희지는 맥주캔을 구기다 말고 휴대전화의 진동과 닮은 소리를 냈다. 저어요? 그래도 잘하는 편일 거예요, 저 영문과 나와서어어…….
  사실이었다. 희지는 영문과를 나왔다. 심지어는 이한을 모부님께 맡긴 채로 대학원까지 나온 사람이었다. 독한 년 소리를 남부럽지 않게 들었다는 소리와 일맥상통했다. 지금이야 동네 작은 학원의 논술 선생님이자 영어 선생님이었지만, 희지는 해브 플러스 피피를 외치며 박수를 갈겨 현재와 아이들의 졸음까지도 완료시킬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입에 물었던 담배를 내려놓은 형자는 그럼 나 좀 알려줘 봐요, 하고 말했다. 정말 대뜸. 알코올에 절여진 희지가 눈을 크게 뜨며 당황했다. 나는 읽을 줄 아는 게 이거밖에 없어요, 엠, 에이, 알, 엘, 비, 오, 알, 오, 말보로. 아 물론 레에드도 알어. 뻘건 거. 꼭짓점 여러 개가 뭉개진 담뱃갑은 민박 사장의 손에서 납작해지는 중이었다. 희지는 눈앞이 빙빙 돌았다. 실없는 소리가 샜다.
  “영어 가르쳐드리면 끅, 디씨해주실 거예요?”
  형자는 끌끌 대며 웃다가 희지에게 몇 차례 던진 질문처럼 또 ‘콜’ 했다. 아는 단어가 많으시네에, 콜, 디씨, 말보로, 레드, 버드와이저. 혀 꼬인 소리를 하며 희지는 캔을 맞부딪혔다. 그리고 꼬인 뇌로 생각했다. 희다면서 희지 않은 수퍼, 좆 같은 분위기의 회사, 다이어트를 한다고 했으면서 맥주를 마시는 민박 사장, 그리고 집에 곧 갈 것 같다고 해놓고 안 갈 임희지까지. 희지는 작게 감복했다. 역시 앞뒤 안 맞는 세상이구나. 다행이었다. 고작 브래지어 때문에 끝날 도망이 아니어서.

  다음날, 뜨끈한 구들에서 깬 희지는 배를 부여잡았다. 평소 잘 마시지도 않던 술에 져버린 모양이었다. 희지가 머리를 부여잡고 몇 번 흔들고 있을 때, 형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깼는가, 영어 선생? ―문장부호가 잘못된 것 같지만. 놀랍게도 정확히 배치된 것이 맞다― 희지는 머리를 손 빗질하며 “네”를 네 번쯤 말했다. 희지가 숙취와 졸음에 막혀 들리지 않는 귀로 열심히 해석한 바는 이러했다. 하나, 국을 끓여놨고. 둘, 알아서 드시고. 셋, 나는 일하러 나가면 세 시에는 돌아오니. 넷, 저녁을 함께 먹으며 영어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 브리핑하라. 다섯, 좋은 하루 보내라. 끝. 장황한 문장의 바다 가운데 핵심만을 뽑아낼 수 있었던 건, 말도 안 되는 수능 영어를 말이 되는 것처럼 들어온 세월 덕분이려니, 자신의 선견지명에 감탄하던 희지는 방문을 열었다.
  북엇국으로 해장을 한 희지는 식사가 끝났음에도 조그마한 식탁 앞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이렇게 할 일이 없던 적은 처음이었다. 정말 휴일이었다. 민박집에는 텔레비전이 있었지만, 채널은 공영방송 몇 개가 다였다. 풍요 속의 빈곤, 넘치는 미디어 속에 살던 희지는 아침의 연속극이 낯설었다. 주변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희지와 형자뿐인데. 형자는 일을 나갔다. 심지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른다, 희지는 아마도 일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녀는 장사가 잘 안되더라도 주인은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할 사람이니까. 물을 한 컵 따라 마신 희지는 창문으로 날씨를 확인했다. 볕이 뜨겁고 바람이 잘 불었다. 딱 좋았다. 희지는 가장 무용하고 즐거운 아이디어를 생각했다. 희지는 웃으며 식탁을 정리했다.

  희지는 무릎을 간질이는 길이의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블루투스 이어폰과 휴대폰만 든 채였다. 콩나물을 닮은 이어폰에서는 흑백영화의 오에스티로 삽입된 노래가 흘러나왔다. 희지는 허밍을 하며 민박집 대문을 열었다. 무작정 바다가 가까워지는 방향으로 걸었다. 그녀는 현재진행형인 자신의 도피에 대해 심도 있게 고민해 볼 요량이었다. 물론 그 계획은 무산되었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던 김희지와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희지는 희지를 보며 놀랐다. 네가 여길 왜……? 서로가 알던 서로가 아니었어도 괜찮았다. 희지들은 서로가 산책 중인 것을 알고 동행을 시작했다. 임희지는 위풍당당하게 앞서 걷고 있는 검은 강아지를 가리키며 이름을 물었다. 희지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백야라고 소개했다. “이름을 딱 너처럼 지었네.” 희지의 말에 희지가 웃었다. “내 배 아파 낳은 건 아니지만 내 딸내미니까. 하는 짓도 나랑 비슷해. 가끔 욕도 하는 것 같아. 너는 어쩌다 네 딸내미 두고 이 동네에 왔어?” 검은 개한테 백야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희지의 꼬이지 않은 질문이었다.

  임희지는 김희지의 말을 뭉개어 들으며 이 도망의 근원에 대해 질문했다. 어린 날의 그녀는 성인이 되어 가장 하고 싶은 것을 꼽으라면 해외여행을 첫 번째로 말하는 사람이었다. 결국 그녀는 어떠한 관례를 거치듯 대학생이 되었고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며 경비를 모았다. 그녀의 모부는 돈을 빌려주겠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희지는 거절했다. 아집이자 치기였다. 그녀는 자기 손으로 돈을 모았다. 온전한 자신만의 여행을 꾸리기 위함이었다. 독한 년이라는 소리를 그렇게 많이 들을 줄 몰랐던 어린 날의 희지는 그때도 충분히 독했다.
  그녀는 여행을 떠났다. 첫 여행지는 아기자기한 디저트가 유명한 나라였다. 영문과인 걸 아는 사람들은 웬 아시아권 나라느냐 물었지만, 과외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은 생각보다 충분하지 않았다. 아쉬운 대로 여행을 떠난 희지는 비행기 안에서 영화를 보게 되었다. 《로마의 휴일》이었다. 희지는 간장 냄새가 물씬 나는 공항에 도착하고 나서도 로마의 여운을 느꼈다. 오드리 헵번, 앤 공주도 사랑스럽지만 희지는 누구보다 브래들리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앤 공주의 인생에서 하나뿐일 일탈은 끝이 났지만. 브래들리의 삶에는 몇 명의 애니아가 더 있을 테니까.
  일주일의 여행은 새로웠고 적당히 알찼지만 싱겁게 끝났다. 한국에 돌아온 후에 여행은 어땠느냐는 질문에 웃음으로만 답할 수밖에 없던 이유였다. 여행지에서의 기억보다 비행기 안에서 본 영화만이 강렬히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희지의 도피도 앤 공주의 마음과 비슷했다. 돌아버릴 것 같았다. 지겨웠다. 그래서 이한이 수능을 치르던 해에 결정했다. ‘나도 도망을 가야겠다.’ 질 속에 정액을 싸질러 놓고 도망간 그 남자애도, 곗돈을 들고 튀어버린 옆집 영은 씨도, 피시방으로 튀어 학원에 오지 않는 중학생도, 이한의 오래오래 사시라던 말을 들었음에도 일찍 가버린 엄마와 아빠도. 더는 남겨지긴 싫었다. 불쌍한 사람으로 기억되기 위해. 누군가 그녀의 인생에 바람을 불어넣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처음에는 이탈리아, 로마로 훌쩍 떠나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겁이 났다. 시장 구경도 하고, 머리도 짧게 잘라보고, 노상 카페에서 차도 마시고, 쇼핑도 하고, 빗속을 걷고 싶었지만. 마흔이 넘어버린 희지에게는 스무 살의 치기가 없었다. 영화를 무턱대고 따라 했다가는 감기나 걸릴 뿐이었다. 그녀는 앤 공주가 아니었고, 브래들리 같은 사람도 현실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그러니까 희지에게 있어서 여기 ‘롬’이라는 마을은 로마의 대체지쯤 되는 곳이었다. 일단 이름이 비슷하다는 점이 메리트였다.
  ‘롬; ROM’. 발음은 같았고, E만 붙이면 꿈의 도시 ‘롬; ROME’이 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희지는 지금 이 마을도 매우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들이치는 바다향이 싱그러웠고, 담백한 마을 사람들도 좋았다. 희지는 그저 받아들이기로(embrace) 했다. 자질구레한 변명(excuse) 없이, 그저 좋은 경험(experience)으로만 남았으면, 자신의 도망(escape)의 끝(end)을 어렴풋이 일러주길 기대(expect)할 뿐이었다. 희지는 형자에게 가르쳐줄(education) 단어를 아주 많이 떠올렸다.

  산책을 마치고 ‘자유 민박’에 들어서자 수돗가에서 미역을 벅벅 씻고 있는 형자가 보였다. 미역은 퉁퉁 퉁겨지는 것만 같았다. 희지는 작게 몸을 숙이고 형자 옆에 쪼그려 앉았다. 누구 생일이에요? 희지의 물음에 형자는 미역국이 누구 생일에만 묵나. 하고 되받아쳤다. 맞는 말이었다. 이한을 낳고 한 달 내내 미역국만 먹었던 적도 있었다. 고개를 주억이던 희지는 작게 입맛을 다셨다.
  미역국에 광어 조림, 달걀부침과 홍어 무침, 굴밥. 누군가 차려준 밥상이 달가웠다. 언제 마지막으로 대접받았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멀뚱멀뚱 천장을, 바닥을 바라보았다. 나방이 없나 확인하던 형자와 바닥의 무늬를 관찰하던 희지 사이에 질문이 하나 던져졌다. 영어는 왜 배우시려는 거예요? 형자는 물로 입을 헹구더니 말했다. 그녀가 질문을 던질 때의 말투와 닮아 있었다.
  “스무 살에 낳은 딸이 미국으로 입양 갔어. 아니, 미국이 아닐지도 모르지. 지금 영어 선생 나이랑 비슷할걸. 그런데 요즘 젊은 사람들 영어는 다 하니까. 걔한테 편지 한번 써보고 싶어서. 안 보내도 되는데, 그냥.”
  희지는 과하게 솔직한 대답에 머리가 띵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자신에게 하는 경고였다. 여기에 살면 다들 핫한 토픽을 던지는 데에 능숙해지는 건가, 하는 궁금증이 일 정도였다. 당황스러운 감정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형자의 표정이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아서였다. 우적우적 과일을 씹는 그녀의 얼굴은 어딘가 후련해 보였다. 그리고 희지는 영화 대사 하나가 떠올랐다.
  ‘Life isn’t always what one likes.’ 삶이란 언제나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롬에 사는 여자들은 모두 휴일을 꿈꾸고, 잠도 잔다. 왠지 롬이라는 마을에 융화된 것만 같았다. 희지는 어깨를 펴고 말했다. 조금 들뜬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우리 편지 꼭 보내봐요, 딸내미한테든 자기 자신한테든. 잘못 가더라도, 결국 어디로든 도착하겠죠.” 형자는 또다시 “콜” 했다. 희지는 웃어 보였다.

*에필로그*

  비가 왔다. 이한은 늘어진 테이프 같은 교수의 목소리로 이어 나가는 강의를 들었다. 재수강 중인 전공 영어 강의는 그다지 유익하지도 않았다. 금방 잊어버릴 게 분명했다. 이건 졸업반의 짬으로 얻어낸 진리였다. 재미있는 강의와 그렇지 못한 강의를 골라낼 수 있는 능력은 있어도 모두 원하는 대로만 채울 수 없는 것 역시 졸업반의 숙명이었다. 오히려 바깥에서 들려오는 빗소리가 훨씬 흥미로울 지경이었다. 누군가 창가에 두었다 잊어버리는 바람에 버려졌을 화분이 눈에 들어왔다. 꽃이 피지는 않았지만, 적당히 싱그러웠다. 재스민인 것 같았다. 빗물이 이파리를 훑었다. 줄기는 꺾여버릴 듯 고개를 숙이고, 물방울은 흔들리며 추락했다. 잎은 고개를 끄덕이는 모양으로 반동했다. 버거워 보인다. 이한의 짤막한 감상이었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충전하지 못한 이한은 번거롭지만 줄 이어폰을 끼고 캔버스 백을 한쪽 어깨에 걸쳤다. 겨우 걸친 가방끈과 다르게 브래지어의 끈이 자꾸만 팔뚝으로 흘렀다. 살이 빠졌나. 브래지어가 늘어난 건가. 이한은 오늘 아침 속옷을 갈아입으며 미묘하게 조이지 않았던 감각을 상기했다. 속옷을 사야겠다. 왠지 기분이 둥실 떠올랐다. 이한은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는 팝송을 흥얼거렸다.

  이한은 에코백과 쇼핑백을 현관에 떨구었다. 우산에서 물이 떨어졌다. 그녀가 돌아왔다. 정확히는 희지가 먼저 있었고 이한은 뒤늦게 알아챘다는 것에 가까웠다. 희지는 이한이 기억하는 모습보다 더 탄 것 같았고, 눈가의 주름이 살짝 늘었고, 화장품을 바꿨는지 눈썹과 입술의 색이 변해 있었다. 그리고 이한은 조금, 아주 조금 이 상황이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내색하지 않고, 다리를 움직였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울면서 웃는 얼굴이 된 이한이 신발을 벗어 던졌다. 표정이 조금 웃길지라도 괜찮았다. 어디 가서 소문낼 사람은 아니니까. 엄마는 어느새 임희지로 돌아와 있었다. 희대의 실종 미수가 남겼던 유일한 도망의 흔적은 코팅이 된 채 냉장고에 붙어 있었다. 이한이 희지를 찾지 않겠다는 다짐과도 닮아 있었다.

  「나는 떠나가는 게 아니라 제자리로 돌아온 거야. 생일 축하해. -임희지」

  식탁에 놓인 쇼핑백과 이한이 들고 있던 에코백 속에는 브래지어가 들어있다.

권보현, 한양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2학년
발명가의 뇌를 가지고 싶어 이야기를 씁니다
거짓말 아녜요

 

작가 인터뷰

Q. 작품 속에서 그녀, 희지의 첫 도피처는 ‘롬’이라는 지역이었고 작품의 배경이 되기도 했죠. 그리고 에필로그에선 그녀가 돌아왔다고 하는데 작가님은 어떤 의도로 에필로그를 넣으셨나요.

A. 에필로그는 희지랑 이한이 행복하길 바라서 넣었습니다. 꽉 막힌 해피엔딩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일전에 친한 언니와 대화하며 나왔던 이야기가 있는데요. 언니가 좋은 이야기는 작품 속 인물이 앞으로 어떻게 살고 있을까가 궁금해져야 한다고 말하더라고요. 저도 크게 공감했던 기억이 있어요. 그 영향을 받아서일까요. 제가 만든 인물이 소설이 끝난 뒤에도 너무 상처받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쓰고 있습니다. 아마 롬으로 도망간 희지도 남겨졌던 이한도 서로를 오랫동안 덮어두었을 거예요.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가끔은 들여다보고요. 희지와 이한은 착하고 현명하니까요. 제 생각에 엄마와 딸은 서로를 미워하기보다는 이해하길 기다리는 게 익숙한 관계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 소설 속 인물들도 서로의 자리를 꼭 지켜줄 겁니다.

Q. 희지는 이제 막 생일을 지나 스무 살이 된 딸로부터 버림받지 않기 위해 먼저 딸을 버렸다. 첫 새치기는 아주 짜릿하다고 할 수 있었다. 보현 작가님의 작품을 예전에도 한 번 읽어봤던 사람이라, 이런 강렬한 문장들을 잘 쓰고, 잘 어울리게 쓰는 작가님 같다고 다시 느꼈습니다. 유방암, 브래지어, 모부님 등 소설에서 보현 작가님이 추구하는 것들이 소설에 은은하게 느껴졌는데 소설을 구성하거나 쓸 때 주로 어떤 것에 주목하시나요?

A. 문장 칭찬 감사합니다……. 부끄럽군요. (•̀//ᴗ//•́) 저는 어딘가에 주목하기 싫어서 다양한 요소를 많이 넣습니다. 다른 분들은 아닐 수도 있는데요, 저 같은 경우는 하나의 소재에 매몰되어버리면 그건 저만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어버리더라고요. 단순한 감상의 나열처럼 보일 때도 있고요. 그래서 흥미로운 글을 쓰기 위해 소재를 열심히 모으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제가 찾는 소재는 제 시야 안에 있는 것들이다 보니, 여성의 삶에서 파생된 게 많은가 봐요.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요. 우리의 삶은 하나에만 종속되어 있지 않잖아요. 이런 일 저런 일은 매일매일 생기니까요. 하루가 하나의 사건처럼 느껴질 때가 있고. 공백처럼 느껴질 때도 있죠. 그래서 더 많은 이야기를 넣고 싶어요. 우리는 이렇게나 복잡한 인생을 사는데, 활자라고 다를 게 있나 싶어서요. 물론 때때로 정신 사납다든가 하나에 집중하면 좋겠다는 평을 듣지만요! 저는 계속 이렇게 쓸 겁니다! 메롱~

Q. 소설에서 전혀 다른 두 화자지만 이름이 같아서 흥미로웠습니다, 두 희지의 삶을 엿볼 수 있어서 재미있고도 신기했습니다. 작가님께서도 동명이인을 만나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A. 재미있는 질문이네요. 히히. 아직 동명의 사람을 만난 적은 없습니다! 사실 그렇게 흔한 이름은 아닌 데다가 제 나이대에 ‘보현’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런데도 한 번쯤은 다루어 보고 싶었어요.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끼리 친한 친구가 되는 걸 옆에서 지켜본 적이 있거든요. 신기했어요. 원래 이름은 불리잖아요. 그런데 이름이 같은 친구와 친해지면 그 이름을 부르는 일이 익숙해진다는 게 정말 재미있더라고요. 그 이름을 말할 때마다 나를 말하는지 그 친구 이름을 말하는지 곱씹게 될 것 같았어요. 음 생각해 보니 예전에 다니던 학원에서 성씨가 ‘황보’이고 이름이 현이었던 친구는 있었어요. 친하지는 않았지만……. 이 질문을 받으니 저도 언젠가 같은 이름을 가진 친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어집니다! 희지와 희지처럼 재미난 이야기를 잘 나눌 수 있는 사이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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