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수
천장에서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한 물은 방바닥이 찰박거릴 정도였다. 양동이에서 넘쳐흐르는 물이 은성의 발가락 틈을 간질였다. 은성은 공을 차듯 발로 바닥에 떨어진 물을 차기 시작했다. 작은 시골집, 한적한 곳에 은성은 마침내 자신이 혼자인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은성의 머리칼은 정돈되지 않아 엉켜 있었고 피부도 푸석거렸다. 은성은 손을 들어 올려 머리칼을 빗어내려 봤지만, 머리카락이 빠지고 끊어져 바닥에 힘없이 떨어질 뿐이었다.
이 정도로 쌓였으면 꽤 지난 것 같은데요, 미리 말씀하시지. 성진의 말에 은성은 마땅히 답할 말이 없어 그저 입꼬리만 올렸다. 그러게요,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성진은 은성의 말이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그저 천장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진의 대충 접은 바지가 조금씩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이 더 신경 쓰였다. 성진은 은성이 무안하게 느끼지 않게 잘 웃으려 애쓰는 듯 보였고, 성진의 그런 면이 느껴져 은성은 도리어 불편했다.
고치는 분들 불렀는데 시간이 꽤 걸려요, 비가 너무 와서 차가 막힌다고. 성진의 말에 은성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현관의 문턱에 서서 성진의 바지만 바라보던 은성이 시선을 내려 자신의 발을 바라봤다. 물속에 오래 불어있는 듯 퉁퉁 불어 터진 듯한 자신의 맨발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무엇이든 오랜 시간 방치하는 걸 은성은 참을 수 없어 했다. 불편을 겪는 사람을 보면 달려가 도와야 했고 행동이 느린 친구들은 타박해서라도 빠르게 일을 끝내야 직성이 풀린 은성이었다. 그런 은성이 어쩌다 모든 것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성진은 대충 물이 흐르기 시작한 천장과 바닥 사진을 찍어두었다. 이런 일들은 더 꼼꼼하게 처리해야 해. 성진에게 딱 하나 남은 아내의 흔적이었다. 기사분이 오려면 적어도 3시간은 걸렸다. 바닥에 깔린 물은 온기를 잃고 차가워진 지 오래였다. 성진은 은성이 서 있는 현관으로 다가갔다. 자신의 신발을 신고 은성을 지나쳐 밖으로 나왔다. 은성은 그런 성진을 멀뚱히 바라보며 자신의 왼발을 오른발로 애써 가리고 있었다.
올 때까지 우리 집에서 기다려요, 물에 젖어서 추우실 텐데. 성진의 호의를 거절하려던 은성이 자세를 바르게 하려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세웠다. 두 발을 힘주어 디뎠고 그 순간 차가운 물이 은성의 종아리에 튀겼다. 여태껏 어쩌든 괜찮다 하며 살던 물의 온도가 유독 차갑게 다가왔다. 은성은 알았다며 옆의 신발장을 열었다. 운동화는 이미 물에 젖어 신기는 버거워 보였다. 은성은 신발장에 남아있는 검은색의 슬리퍼를 바라보았다. 남편의 물건이었다. 검은색 바탕에 하얀 글씨가 쓰여 있었지만, 이제는 그 글씨마저 더러워져 흐릿했다. 가져가지 않은 게 있구나. 은성은 슬리퍼를 꺼내 신었다. 큰 슬리퍼에 자신의 발은 턱없이 작아 계속 벗겨지는 것 같았다. 은성은 저의 발가락에 힘을 주었다. 성진의 집은 바로 옆집이었다. 얼마 걷지 않아 성진의 집에 도착했다. 다른 여느 가정집과는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외관이었다. 성진의 집을 들어섰을 때 은성이 느낀 것은 온기였다. 그곳은 조금 따듯할까 하며 걱정하던 은성은 자신의 걱정이 무색함을 느꼈다. 간만에 느끼는 온기에 은성은 손끝과 발끝이 간지러웠다.
성진의 집에 들어서자 성진은 젖은 다리를 닦을 수건을 은성에게 건네주었다. 은성은 성진의 손을 바라보다 제 손을 뻗어 받아들었다. 현관을 넘어 들어가기 전에 다리에 축축이 묻은 물을 닦았다. 입고 있던 검은색의 바지에 튄 물을 은성은 수건으로 한번 닦아 보기도 했다. 은성은 발을 닦고 성진의 집 현관을 넘어서 거실로 향했다. 성진이 소파 위에 앉은 은성에게 따듯한 녹차를 내려 주었다. 성진의 집은 우드톤의 가구들이 많아 포근하게 느껴졌다. 으레 있을 법한 라면 봉지 하나 보이지 않았다. 작은 인테리어용 가구들도 여기저기 놓여 집 안을 화사하게 꾸미고 있었다. 은성이 본 성진의 첫인상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성진은 집 계약을 할 때 처음 마주했다. 성진은 단정하게 올린 머리에 메탈 시계와 조금은 날카로운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잘 웃었지만, 웃는 얼굴은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다. 반면 은성의 남편 현우는 그 모든 상황과 집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건지 시종일관 무기력한 태도였다. 현우에게 닥친 인사발령은 유배와도 같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현우는 작은 하자에도 그 탓을 대고 서울로 돌아가고 싶은 눈치였다. 성진과 계약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은성에게 성진이 근처에 맛있는 식당이 있다며 위치를 알려주었다. 새로운 집에 들어서는 새로운 시작이 기분 좋은 게 좋지 않겠느냐는 말을 건네기도 했다. 은성은 성진의 말이 그저 부담스러운 오지랖이라 느꼈지만, 현우와 함께 식당으로 가기로 했다. 내내 툴툴대던 현우 역시 식당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은성에게 이런저런 말을 먼저 건넸다.
“물 흐른 지는 얼마나 지난 거예요?”
성진은 은성의 맞은편에 앉아 은성에게 물었다. 은성이 차가워진 손끝을 찻잔을 감싸 녹이며 안에 담긴 물의 약한 일렁거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일주일 좀 넘었어요. 은성의 짧은 답에 성진은 잠시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성진 앞에 앉은 은성의 모습은 꽤 오랜 시간 습기에 젖은 듯 축축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왜 진작 말을 하지 않았냐는 말을 하기도 전에 은성은 그에 대한 답을 했다. 비가 그치면 끝날 줄 알았어요. 일주일간 장마가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은성은 자신이 언제쯤엔가 저런 말을 했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분명 그 말을 하는 동시에 더는 그 말을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던 것도 떠올랐다. 겨우 5개월 남짓한 시간, 다시 그 말을 하게 된 자신이 조금은 원망스러워졌다.
은성이 그 말을 다짐한 순간은 부모님 앞에 앉았을 때였다. 무릎을 꿇고 앉은 것도, 고개를 푹 숙인 것도 아니었지만 무릎이 뻐근했고 발목은 피가 안 통하는 듯 저렸다. 목덜미마저 뻐근해져 은성은 괜한 목만 이리저리 돌려대고 있었다. 아주 짧은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은성의 말과 은성 부모님의 대답 사이 간극은 한참이었다. 은성은 멍하게, 아니 사실은 아주 담담하게 부모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외관은 그래 보였다. 은성은 최대한 자신의 격한 감정을 숨기고 있었다. 자신의 주변에 그 누구도 없더라도 혼자 살아갈 수 있다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이혼은 그런 것이었다. 내 편이었던 가족을 다시 남으로 돌리는 일이었다. 기나긴 기다린 끝에 이유를 물었고 은성은 그 장황한 이야기를 한마디로 줄였다.
“알아서 멈출 줄 알았어요.”
뭐를? 짧게 돌아온 답에 은성은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지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차 한쪽에 떨어진 귀걸이, 시트에서 나는 은은한 여자 향수 향기, 입술 선 너머로 조금씩 보이던 립스틱 번진 자국. 어떤 것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바람을요. 하고 은성은 답하며 손의 힘을 더 주었다. 계속 추위가 느껴졌고, 은성은 그 추위를 버티지 못한 몸의 떨림을 부모님이 보고 오해할까 무서웠다. 은성은 몸에 힘을 더욱 바짝 주었고 미세한 떨림은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은성의 아버지는 당당하게 허리를 치켜들고 시선에 힘을 주어 자신을 바라보는 은성이 낯설었다. 정말 자신이 키워왔던 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차가워진 은성에게 할 말이 없었다. 머뭇거리며 그저 은성을 바라보던 은성의 아버지를 제치고 먼저 답한 건 은성의 어머니였다. 그렇게 네가 좀 잘했어야지. 은성은 그때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이혼은 그런 것이니까. 은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봄의 시작, 품을 파고드는 한기에 은성은 늦게나마 목도리를 꺼냈다.
은성이 목도리를 쓰기 시작한 것은 이혼을 결심한 이후였다. 남편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미안하다고 빌면 속은 척 넘어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은성의 머릿속에 지나갈 때마다 은성은 자신의 머리를 급히 털었다. 남편은 은성이 내민 이혼 서류에 서명했다. 아무런 부정조차 않았다. 은성과 현우 사이에 아이는 없었고 망설일 이유 하나 없는 듯 보였다. 은성은 현우가 집을 나설 동안 안방 침대 위에 가만히 앉아 벽지를 보고 있었다. 바스락거리는 현우의 소리를 듣지 않으려 했다. 이혼 숙려기간이 끝이 나고 확인 기일이 되었을 때 은성과 현우는 법원에서 만났다. 은성은 목도리로 계속 제 얼굴을 가렸다. 추위에 떨고 있는 은성을 향해 현우는 등을 보였다. 별다른 일 없이 흘러간 이혼이었다. 같이 산 지 7년이 넘어가는 부부였다고는 생각되지도 않았다. 현우는 이제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알 수도 없을 정도로 깔끔한 이별을 마쳤다.
그 이후로도 순조로웠다. 그 집 그대로 살게 되는 은성은 마땅히 바뀔 것도 없는 일상 속에서 살았다. 밖으로 나가는 것도 싫어지기 시작했지만, 집에만 있다고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필요한 것은 배달이 되었고, 일은 집에서 했다. 은성의 세계에 오류가 나기 시작한 것은 여름 장마 때문이었다. 때 이른 듯한 장마가 찾아왔다. 근 일주일 동안 장대비가 내렸다. 창밖은 언제나 흐렸고 따라 축축해진 집안의 공기에 은성은 자신이 무기력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침대 위에 누워 눈만 끔벅이며 보낸 날이 몇 밤이었으리라. 은성이 누워있는 침대 바로 옆으로 물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은성을 일어나게 한 것도 누수 때문이었다. 은성은 떨어지는 물을 몇 번 수건으로 닦아내다 대야를 꺼내 내려두었다. 그것만으로 하루에 몇 번은 은성은 규칙적으로 일어났다. 물을 버리러 화장실로 가는 길 거실에 떨어진 쓰레기들을 주워 올리고, 청소마저 끝내자 허기가 졌다. 은성은 배달을 시켜 간만에 치킨을 먹었다. 장마에 튀김 옷이 눅눅해지긴 했어도 맛은 있었다. 빗발이 점점 강해지고, 잠을 자고 일어난 은성의 발가락에 바닥의 물이 축축이 닿았다. 은성은 몸을 일으켜 대야의 물을 버리고 바닥을 수건으로 닦았지만, 장판에 습기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집에서는 퀴퀴한 곰팡이 내가 진동을 했다. 은성의 발이 부르틀 정도가 되었을 때 은성은 성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른 게 아니고요, 물이 계속 천장에서 떨어져요.”
결혼 생활을 하며 은성이 무기력해진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은성은 결혼 후 직장을 그만두었다. 현우가 은성이 그만두어도 충분한 밥벌이를 할 수 있다고 했고, 은성은 자신이 어렸을 적부터 꿈꾸던 공예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무작정 회사를 그만두고 나온 은성은 학원을 하나 다니기 시작했다. 도예과는 아니었지만, 대학 시절 시각디자인을 했던 은성에게는 미대 학생다운 손재주가 조금은 있었다. 입시를 하면서 손재주를 만들긴 한 것이었지만, 그 점이 이제야 빛을 발하는 것만 같았다. 현우는 은성이 학원에 다니는 것을 항상 응원해주었고, 작품을 완성해오면 예쁘다며 핸드폰에 사진을 찍어두었다. 은성이 자격증을 따고 학원을 그만두었을 때는 이제는 무얼 하고 싶냐는 질문을 넌지시 던졌다. 그즈음 현우는 은성에게 육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고, 그 의도를 모른 척 넘어갈 은성은 아니었다. 결혼한 지 2년이 넘어가고 있던 찰나였고, 둘에게는 근 5년간의 노력이 무색하게 아이가 없었다. 은성은 이혼했을 때 잠시나마 그 사실에 안도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친척들의 잔소리에 괴로웠었지만 그래도 우리 사이에 아이가 없어서, 떠맡고 떠넘긴다는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었다.
현우는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이 조금은 의아하다는 눈치를 보였으나 그 탓을 은성에게 미루지도 않았다. 불임 검사를 받아보러 가자는 말은 했어도 시험관까지 해서 은성의 몸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은성은 그런 현우의 태도에 더 미안함을 느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님은 알았어도, 이상하게 계속 현우 앞에서 작아지는 것은 은성이었다. 은성은 그즈음 감을 잃지 않으려 만들던 도자기 공예품들을 만들지 않기 시작했다. 입술을 꾹 물어대는 습관도 생겼고 이상하게 점점 명치 부근이 꽉 막힌 듯한 느낌도 들었다.
성진은 은성이 생각에 잠긴 모습에 다른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 중이었다. 은성의 피곤한 얼굴은 며칠간의 장마를 혼자 흡수한 듯 축 늘어졌다. 은성은 자신의 표정이 어떤지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애써 입꼬리를 들어 올려 어색하게 웃었다. 은성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작은 토끼 인형을 만지작거렸다. 도자기로 만들어져 대부분 포근해 보이는 색들로 칠해진 두 개의 인형이었다. 한 마리 토끼는 분홍색의 앞치마와 아이보리의 두건을 쓰고 있었다. 다른 한 마리는 하늘색의 셔츠를 입고 검은색 동그란 안경을 끼고 있었다. 두 토끼는 서로를 마주 보며 서 있었다. 은성은 이혼 후에 도자기 인형을 만드는 일을 다시 시작했지만, 전처럼 만족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도리어 완성된 작품을 볼 때마다 허전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좀처럼 어떤 일들도 쉽게 느껴지지 않았다.
성진은 은성이 다른 생각으로 빠져나간 것이 눈에 보일 때마다 화제를 돌리고 있었다. 날씨가 언제쯤 맑아질까요, 밥은 드셨어요. 따위의 질문을 던졌다. 은성이 관심을 보일만 한 화제가 뭐가 있을까 고민하는 눈치에 은성은 애써 맑은 표정을 답을 하려 했지만, 너무 오랜 시간 작아져 있던 은성이 밝아 보일 리는 없었다. 은성은 자신의 손에 토끼 공예를 쥐었다. 인테리어 용품이 많네요. 집 꾸미는 거 좋아하시나 봐요. 은성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하자 성진은 멋쩍은 웃음으로 답했다. 아내가 좋아해서요. 지금은 세상을 뜨긴 했는데, 흔적을 치우기가 쉽지가 않아요. 놔두면 예쁘기도 하니까요. 성진이 애써 웃으며 답하기는 했지만, 분위기는 어쩔 수 없이 적막해졌다. 은성은 성진의 담담한 면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래도 성진에게 호들갑은 어올리지 않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비록 몇 번 본적도 드물고, 지나가다 마주치는 정도였지만 말이다. 은성은 자신의 이야기도 해야 하나 몇 번 고민하다 그저 입을 다물었다. 성진이 마주한 은성의 집 모습이 충분히 설명되었을 것 같을 정도로 휑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은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들어왔던 토끼 인형을 내려두었다. 그러고는 자신도 도자기 인형을 만들어 납품한다고 이야기했다. 가게를 열 계획이라는 은성의 말에 성진은 그럼 몇 개 사러 가야겠다는 답을 했다. 은성은 성진과의 몇 안 되는 대화를 하는 동안 집 안의 난방 탓인지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
“길을 좀 나서면, 노을 지는 풍경이 예쁜 곳이 있어요. 가본 적 있어요?”
성진은 비가 그친 창가를 바라보는 은성에게 말했다. 저녁노을 빛이 창틈 사이로 천천히 내려앉아 주위가 주황빛이었다. 은성은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온 이후로는 현우와도 잘 나가지 않았다. 현우는 직장이 바빠져 피곤하다는 말을 하기 십상이었고, 나중에는 주말마다 직장 동료와의 약속, 등산, 출장 등을 핑계로 집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혼자 나가도 되는 풍경을 보러 나가지 않은 것은 궁상떠는 아줌마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도 있지만 그런 풍경은 혼자보단 현우와 함께 봐야 아름답기 때문이었다.
“아내 떠나고 몇 달은 집구석에만 있었는데, 일 때문에 잠깐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봤어요. 밖으로 나와야 볼 수 있더라고요. 뭐든.”
성진은 나중에 한번 보러 가자 했다. 은성은 머뭇거릴 틈도 없이 그러자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나와야 볼 수 있다는 것을, 온기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배우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집을 고치러 인부들이 왔고, 집을 고치는 내내 문턱에 서 있던 은성은 더는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가만있어도 덥고 찌뿌둥한 여름이었고, 더는 목도리가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았다. 시간이 꽤 걸린다는 말에 은성은 혹시 몰라 우산을 챙겨 밖을 걸어나갔다. 비가 내려 날이 좋지는 않아 노을을 볼 수 있을지 몰랐지만 그런데도 그저 나가고 싶었다.
은성은 무작정 노을이 예쁘다는 그곳을 향해 걸었다. 가는 길에 하늘이 잠시 맑아졌지만, 곧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었다. 은성은 차마 그 노을을 볼 수는 없었지만 뻥 뚫린 해변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 은성은 어둑해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공기는 여전히 눅눅하고 습기가 가득했지만 은성의 피부는 그런 찝찝함이 더는 낯설지도,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주변의 습기는 아무래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는 더는 물소리가 나지 않을 것이고, 구석구석 곰팡이들을 닦아낼 것이었다. 그럴 생각을 하면 머릿속이 맑아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