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불씨들, 이하나

불씨들

  막바지에 이른 것들은 언제나 아름다워.
  누군가 그렇게 말했고 곧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옥상 난간은 개미 떼처럼 몰린 사람들로 가득했다. 가장 뒤에 서 있는 건 나뿐이었다. 나는 수천 개의 불씨가 추락하는 진풍경을 미묘한 눈동자로 훑고 있었다.

  파티는 한창이었다. 회사 옥상은 퇴근도 마다하고 모인 직원들로 북적거렸다. 100평 남짓한 공간이었음에도 편히 발을 딛기엔 무리가 있었다. 난간은 곳곳에 생화로 된 장식이 달려있었다. 따로 설치된 조명은 없었으나 장식 사이 박힌 촛불이 대신 은은한 빛을 뿜어냈다. 그 빛을 조명 삼아 직원 몇은 사진을 찍기도 했다. 난간 앞쪽으론 기다란 테이블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위로 음료 바구니와 마른안주, 카나페, 피자 상자가 놓여 있었다. 파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음식은 바닥을 보이는 듯했다. 옥상 중앙에는 인공 잔디가 깔린 7cm 높이의 원통형 무대가 있었다. 파티의 주인공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난 그 비좁은 공간에 세 시간을 서 있었다. ‘축 5컷 회귀 완결’, ‘누적 5억 뷰 돌파’ 같은 현수막이 펄럭거리는 배경을 등진 채로 말이다.
  작가님 미리 완결 축하드려요.
  파티가 시작되고 오 분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흰 셔츠를 입은 한 여자가 무대 쪽으로 다가와 꽃을 내밀었다. 처음엔 난 그게 나를 향한 축하 인사인 줄 알았다. 여자의 손이 나를 지나쳐 내 옆으로 향하기 전까진 말이다. 내 옆의 남자는 원강 작가라 불리는 사람으로 오늘따라 못 보던 남색 정장을 빼입고 서 있었다. 나를 외면하는 여자를 본 순간부터 나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파티에 온 직원 대부분의 시선이 내가 아닌 원강 작가에게로 향할 것이라는 걸.
  원강 작가는 내가 집필한 작품 ‘5컷 회귀’의 그림작가였다. 그는 나에겐 선배 작가였고 영화화된 장편 웹툰을 두어 개 정도 가진 회사의 간판이기도 했다. 오늘만 놓고 보면 웹툰의 마지막 화가 올라가기도 전에 완결 기념 파티를 열게 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실제로 마지막 화는 내일 밤에나 올라갈 예정이었다. 파티 일자가 그의 일정을 최대한으로 고려해 정해진 탓이었다. 원강 작가에게 악수를 청하는 사람들의 몸짓은 대체로 나를 대할 때와는 다른 온도를 지녔다. 그가 손을 뻗기 전까진 직원 중 누구도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았다. 나의 경우 막 데뷔한 터라 원 작가와는 사정이 달랐다. 회사 내 PD나 연차 높은 담당자의 농담 정도는 무난하게 넘어가야만 했다. 이를테면 그들이 내게 먼저 내민 손을 달갑게 감싸 쥐거나 그들이 쓰다듬을 수 있도록 어깨와 머리를 내어주는 식이였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다 발등에 치인 무언가를 밟아버렸다. 원강 작가 앞에 쌓인 꽃다발이었다. 얼핏 보기엔 옥상 전체를 장식한 꽃보다 많아 보였다. 그걸 세고 있자니 한껏 세운 어깨가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림 정도는 나도 얼마든지 잘 그릴 수 있는데.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공모전을 통해 얼떨결에 데뷔한 신인이었고, 나에게 원강 작가와의 합동 연재는 계약서상의 우선 조항이었으니까. 작업 초기 원강 작가는 나에게 편하게 강 씨, 하고 부르면 된다고 했다. 뭣하면 그냥 오빠라고 부르라고. 그 정도로 편하게 작업을 진행했으면 한다고. 그러나 말 한마디만으로 편안한 감정을 갖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나와는 띠동갑인 그의 나이 탓에 나는 그의 이름 뒤에 씨 자 붙이기를 어색해했다. 그래서 여태 선배님이나 작가님 같은 호칭으로 자칫 더 불편해질 수 있는 상황을 무마해왔다. 분명 그랬을 터인데. 텅 빈 내 발치를 보자 없던 오기가 생겼다. 때마침 옥상 입구에서부터 직원 한 무리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들의 걸음이 무대와 가까워졌을 때 난 원강 씨, 하며 그를 급하게 불러 세웠다. 그리곤 그와 마주 보고 서서 아주 중요하고 은밀한 사담을 나누는 척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하자 나에게 악수를 청하는 직원들의 움직임이 부드러워졌다. 그들 중 몇은 내가 먼저 손을 내밀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주기도 했다. 난 직원 한 명이 다가올 때마다 원강 작가와 두 마디 이상의 대화를 나눴다. 주로 오늘 입고 온 정장이 잘 어울린다거나 구두가 멋지다는 등의 가벼운 칭찬들이었다. 그동안 원강 작가는 독심술이라도 쓰는 사람처럼 무의미한 질문 세례에도 기꺼이 응답해 주었다. 난 그로부터 어떤 대답이 흘러나오든 재밌다는 듯 크게 웃기만 하면 됐다. 더 이상의 사담이 벅차다고 느낄 무렵이었다. 누군가 내 품에 거대한 장미 다발을 안겨주며 환호성을 질렀다.
  인기 작가의 은퇴식인데 이 정도는 해줘야지.
  100다발은 족히 돼 보이는 장미의 주인은 민경 언니였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것으로 보아 방금 구매한 것 같았다. 민경 언니는 내게 장미를 넘겨주곤 급히 젖은 옷깃을 정리했다. 어색한 환호성이며 표정이며 정말 내가 알던 사람이 맞나 싶었다. 지난 2년간 내 원고를 깐깐하게 평가했던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 어리숙한 모습이었다. 언니는 손을 털어내더니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같이 사진이라도 찍자는 건 줄 알았는데 딸려 나온 건 모서리가 찢어져 반으로 접힌 종이였다. 언니는 내게 종이와 함께 팬 하나를 건넸다.
  더 뜨기 전에 나 사인 하나만 해주라고.
  펼쳐진 종이를 자세히 보니 5컷 회귀 프롤로그의 대표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죽을 무렵이 되어서야 사람은 시간의 본질에 가까워진다. 빨랐다가, 느렸다가, 때론 지독했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부드럽게 한 사람의 혼을 감싸는 가장 차분한 속성에 말이다.
  이걸 이렇게 프린트된 상태로 들고 올 줄은 몰랐다. 나의 첫 작품이자 첫 번째 화였기에 소중하게 간직하는 부분이었는데. 언니 또한 나와 마찬가지의 마음이라니. 왠지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는 종이를 한동안 만지작거렸다. 문구를 새기던 밤이 아직 생생했다. 프롤로그는 민경 언니가 몇 번이고 수정을 요구하던 부분이었다. 민경 언니는 나보다 네 살 많은 담당자였다. 언니와 나는 회사 건물 1층의 카페에서 처음 만났다. 둘 다 초면임에도 자기소개 하나 없이 작품 이야기부터 꺼냈던 기억이 선명했다. 언니는 신인 작가의 작품은 프롤로그 하나로 희비가 교차한다고 했다. 그날 언니는 내게 조심스럽게 명함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이것만 알아주면 좋겠어요. 난 초고속 승진이 목표에요. 근데 무영 씨가 떠야 나도 뜰 수 있어요, 그러니까 앞으로 같이 잘 해봐요,
  명함에는 주임이라는 직책과 함께 이메일 주소가 적혀 있었다. 언니는 앞으로 메일로 소통하게 될 거라고 했다.
  완결까지 1화만을 남겨둔 내 첫 작품 ‘5컷 회귀’는 신인 만화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차지한 작품이었다. 웹툰의 장르는 회귀물이었다. 생과 사를 반복하는 주인공에 관한 이야기였다. 내용은 제목에 충실했다. 분량은 다섯 개로 나눠진 컷이 전부였다. 그 안에서 주인공 서연이가 불의의 사건과 얽혀 죽음을 맞이하고 다음 화에서 다시 살아나는 형식이었다. 시작은 단순했다. 졸업 작품으로 준비하던 것을 공모전에 제출한 것이 계기였다. 당시 난 지방 4년제 애니메이션과의 마지막 학기에 진학 중이었다. 취업 정보 사이트를 뒤지는데 하단의 배너에 공고 하나가 올라와 있었다. 나는 배너에서 오랫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건 탑원에서 주최하는 공모전이었다. 웹툰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그곳을 모를 수 없었다. 탑원은 웹툰계 최초로 GL, BL 장르를 도입한 곳이었다. 회사는 복합 상가의 꼭대기 층만 쓰는 크기였지만 판교신도시 한복판에 있어 접근하기 쉽다는 이점이 있었다. 탑원은 꾸준히 젊은 작가를 배출해내는 회사로도 유명했다. 그래서 신생 작가들의 대표 등용문이 되는 곳이나 그만큼 들어가기 어려웠다. 난 계속 망설이다 공모전 마감 당일에서야 원고를 보냈다. 본선까지만 진출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간절하게. 물론 그게 정식 데뷔까지 갈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알지? 너 작품이 뽑힌 이유는 99라는 성질을 가장 강하게 지녔기 때문이었어.
  사인이 새겨진 프롤로그 종이를 고이 접어 넣으며 언니는 말했다. 그건 웹툰을 처음 계약할 당시부터 질리게 들어온 말이었다. 처음 합격 연락 전화를 받았을 때 민경 언니와 PD는 몇 번이고 99라는 숫자를 강조했다. 세간에서는 99, 999와 같이 일정량을 남겨두고 막바지에 이른 것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고. 이게 내가 제출한 플롯과 겹친다는 것이었다. 애초 내가 공모전에 제출했던 웹툰 기획안에 따르면 웹툰은 총 16화로 완결이었다. 공모전 사항에는 분량에 대한 제한이 없던 까닭에서였다. 그런데도 수화기 너머론 재차 99라는 숫자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12화까지 연재해보고 독자 반응에 따른 고료 인상을 약속하겠다고. 분기별 추가 인센티브도 확실하게 지급할 테니 딱 99화까지만 끌고 가보자고, 전화를 끊자마자 머릿속엔 한 가지 고뇌만 남았다. 혹시 내가 돈이 궁한 티를 냈던가?
  계약이 성사되고 한동안 민경 언니는 내게 많은 아이디어를 던져 주었다. 내가 아는 민경 언니는 단조로운 구성도 극적으로 둔갑시키는 재주를 가진 사람이었다. 뒷배경의 무늬나 지나가는 엑스트라의 의상까지 세심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니까.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지적은 절대 하질 않았다. 언니와 나의 의견이 갈린 적은 드물었다. 2년 남짓한 시간 동안 우린 사소한 다툼조차 없었다.
  나는 찬찬히 품에 쥔 장미를 쓸어내렸다. 소란스러워진 분위기로 보아 곧 불꽃놀이가 시작된다고 했다. 난 민경 언니의 손에 이끌려 난간 쪽으로 향했다. 이미 많은 사람이 난간에 달라붙어 불꽃놀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때마침 노을의 끄트머리가 난간 부근에 검고 노란 광선을 씌우며 완전히 저물었다. 옥상은 한순간에 검어졌고 사람들은 마치 저마다 다른 국적을 가진 듯 말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산스러운 움직임 뒤로 한쪽에서는 불꽃 준비가 한창이었다.
  이제 쏘려나 봐요.
  나는 벌써 보이는 것 같아.
  불이?
  길이.
  무슨 길인데요?
  저기 빛.
  민경 언니는 손가락으로 하늘의 정중앙을 가리켰다. 곧 밤하늘 가득 불꽃이 우산처럼 펼쳐졌다. 검은 하늘이 서서히 붉게 물드는 모습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얼굴이 시큰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곧 완결이 다가온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고막보다 목구멍이 더 먹먹했다. 민경 언니는 불꽃이 떨어지는 방향을 따라 난간 끄트머리로 향했다. 불꽃은 한동안 끊이질 않고 연속해서 피어올랐다.
  막바지에 이른 것들은 언제나 아름다워.
  그건 열 번째 불꽃이 터지는 순간 내 귓가를 파고든 목소리였다. 분명 민경 언니 부근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는데 정말 언니가 뱉은 건지는 몰랐다. 언니가 내 앞에서 저런 투로 말한 적은 없었으니까. 어쩌면 난 언니가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사람이었던가, 하며 그녀를 의심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건 일반적인 진지함과는 다른 부류의 얼굴이었다. 업무에 집중할 때 나오는 자연스러운 면모와는 달랐다. 얼굴 안색이 주름지고 무거워 조금의 안쓰러움을 전달받게 되는 표정에 가까웠다. 나는 난간으로부터 떨어진 곳에 서서 언니를 지켜보았다. 노랗고 푸른 불빛이 언니의 전신에 일렁였다가 금세 사라졌다. 섬광이 걷힐 때마다 옥상은 먹구름이 드리운 듯 차차 흐려졌다. 희끄무레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 가며 나는 고개를 젖혔다. 그리고 한참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불꽃은 너무 조급하게 올라가는 게 아닌가. 저건 또 너무 빨리 사라지는 게 아닌가 하는 마음을 품고서. 불꽃이 완전히 바닥나 옥상이 다시 잠잠해지기까지 언니와 나는 한참을 그곳에 얼어붙어 있었다.

  아침부터 민경 언니한테 전화가 걸려 왔다. 미리 얘기한 대로 오후에는 옥상에서 완결 기념 사인회가 열릴 거라고 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나는 머리를 감싼 채 그대로 주저앉았다. 어떻게 이걸 까먹을 수가 있지? 난 원강 작가로부터 점심 식사 제안을 받고 회사로 향하고 있었다. 민경 언니의 전화는 회사 맞은편에서 받았다. 그러니까 내 옷차림은 꾸몄다고도 꾸미지 않았다고도 하기 애매한 차림이었다. 오늘의 코디는 벨벳 재질의 베이지색 셔츠와 검정 슬랙스였다. 신발은 구두를 신으려다 대신 굽 낮은 낡은 로퍼를 골랐다. 한마디로 모든 게 엉망이었다. 이건 다 원강 작가를 의식하지 않으려다 나온 결과였다. 언제부터 내가 그 사람의 눈치를 봤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단지 내가 그를 어려운 사람이라고 인식한 만큼 그 앞에선 어른스러워 보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러나 그걸 죽어도 티 내고 싶지는 않았다. 전날 파티만 봐도 그는 사인을 요청하는 직원들을 노련한 움직임으로 응대했다. 내가 엉성하게 휘갈겨 쓴 걸 사인이랍시고 챙긴 민경 언니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언니는 종이를 보며 너 사인 좀 만들어야겠다, 하고 미소만 지었다. 그때 언니가 왜 내게 그런 말을 꺼냈는지 미리 눈치챘어야 했다.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는 동안 나는 작업실로 다시 돌아갈지 말지 고민했다. 그러나 약속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에게 특별한 서명은 있던가? 생각하며 나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원강 작가와의 점심은 회사 근처의 일식집에서 해결했다. 나는 점심 특선 초밥을, 원강 작가는 장인 초밥 세트를 주문했다. 처음엔 나도 원강 작가와 같은 메뉴를 고르고 싶었다. 그러나 메뉴판을 두고 그로부터 점심은 자신이 사겠다는 뉘앙스가 풍기는 순간 입맛이 떨어졌다. 나는 주머니 밖으로 꺼냈던 카드를 다시 깊숙이 찔러넣었다. 주머니 속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메뉴판을 정독하는데 입술이 바싹 말라버렸다. 왠지 비싼 메뉴는 고르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갚아야 할 빚이 될 것 같았다.
  무영 씨 혹시 내 어시스던트 해볼 생각 있나요?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원강 작가는 웹툰의 완결 이후 내 일정을 물었다. 준비하고 있는 작품이 있나요. 있어요. 하고 싶었던 작품은요. 많아요. PD로부터의 새 작품 의뢰가 있었나요. 없어요. 회사와 깊은 얘기를 나눈 적은요. 한 번도요. 나는 설문 조사지를 작성하듯 그의 물음에 차분히 답했다. 그는 여러모로 내게 도움을 주려는 듯 보였으나 나에겐 그의 관심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그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일에는 그의 밑으로 들어가겠다는 결심이 필요했다. 그래서 난 고민할 시간이 필요해요, 라며 답을 얼버무렸다. 물론 그 말을 뱉는 순간에는 정말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작품이 완결되면 내가 어떻게 될지 몰랐으니까.
  곧 도마 두 개가 각각 나와 원강 작가 앞으로 놓였다. 원강 작가는 수저통에서 새 젓가락을 꺼내 소고기와 전복이 올려진 초밥을 집었다. 그리고 그것을 내 도마 위로 옮기며 말했다.
  이번에 무영 씨가 그린 99화 잘 봤어요. 오늘 자정쯤에 올라가겠네요. 역시 제 어시스던트 해볼 생각은 없나요?
  죄송해요. 조금만 더 생각해 볼게요.
  그 조금이라는 단어를 발음하며 나는 속으로 곱씹었다. 조금이, 조금이 아닐 수도 있겠다고. 그게 한 달이 되고, 두 달이 될 수도 있겠다고.
  5컷 회귀를 연재하는 동안 원강 작가의 그림을 보조한 적이 있었다. 주로 채색이 들어간 그림 위에 명암만 추가하는 간단한 작업이었다. 세이브 원고를 대량 생산해놓고 여유가 생기는 주간에만 그랬다. 가만 보면 그는 충분히 혼자서 그릴 수 있는 부분을 꼭 나에게 넘겨주곤 했다. 그게 해당화의 하이라이트 구간이라고 해도 말이다. 원강 작가는 평소 태블릿 두 개로 그림을 그렸다. 그건 그의 작업실에서 가장 비싸 보이는 물품이었다. 그의 작업실은 회사 뒤편에 있어 나도 가끔 들려 구경하곤 했다. 아마 조그만 출판사와 맞먹을 정도의 크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그를 처음 본 날, 그는 나에게 작업실의 일부를 내어주겠다 제안해왔다. 물론 나는 그걸 거절했다. 한 공간에서 그와 많은 말을 주고받을 일이 벅찰 것이라 느꼈다. 실은 주고받는 말의 양보다 그 말에 어떤 의도가 담겨있을지가 더 걱정됐다. 내게 그의 첫인상은 까다로워 보였으니까. 그러나 그는 예상외로 능글맞은 배포를 가진 사람이었다. 내가 그의 제안을 거절했을 때 그는 더 큰 보상을 걸고 되물었다. 그의 어시스던트 중 한 명이 출산휴가를 얻어 사용하던 오피스텔이 빈다고. 그곳을 내 작업실로 내어주겠다고 했다. 오피스텔은 회사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인 곳이었다. 내 본가는 김포였는데 회사와는 두 시간 거리에 있었다. 나는 그의 제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너무 달콤했다. 오피스텔로 짐을 옮긴 첫 주부터 나는 원강 작가와 전화로 소통하기 시작했다. 그는 선을 딸 때마다, 채색을 넣을 때마다 내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 무영 씨, 서연이 표정은 어때요? 묘사랑 어울리나요? 원강 작가는 그런 식의 질문으로 내가 원하는 연출이 그림에 드러났는지 물었다. 처음엔 그게 고마웠지만, 연재일이 늘어날수록 나는 궁금해졌다. 그가 충분히 실력 있는 사람이라는 걸 모두가 아는데 그는 왜 내게 자꾸만 조언을 구하는 걸까, 하고 말이다. 어쩌면 그건 까마득한 후배에게 갖춘 최대한의 예우가 아니었을까 하고 나는 생각하기로 했다.
  5컷 회귀 98화를 작업하던 주간에 원강 작가로부터 전화가 걸려 온 적이 있었다. 그날 그는 평소와는 다르게 안정되지 못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내가 전해 말한 적 있었죠. 명암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같은 그림도 다르게 보인다고요. 근데 무영 씨는 모든 장면에 눈물을 흘려 넣는 기분이에요. 그게 왜 그렇게 슬픈지. 내 후배랬죠? 이번만큼은 무영 씨 혼자 그려봐요.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조금은 극적이게요.
  전화를 끊자마자 나는 얼굴을 감쌌다. 눈가가 촉촉했다. 두 소매가 젖을 무렵에 이르러서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 안 어딘가에서 앞으로도 그의 도움을 받게 될 거란 확신이 자라고 있었다. 나는 원강 작가의 전화가 다신 없을 기회임을 직감하며 99화 작업을 시작했다. 대신 99화를 쓰고 그리는 동안 그를 의심하기로 했다. 그림작가가 글 작가에게 그림을 맡긴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었으니까. 혹여 그가 자기 작품에 애정이 없는 편은 아니었는지. 그가 여태 보여주었던 태도를 머릿속으로 되새김질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찾은 답은 백지였다. 그와는 이년 넘게 작업을 해왔지만 난 여전히 그를 잘 몰랐다. 그의 언어를. 그의 성질을. 그래서 나는 나름대로 급한 결론을 내렸다. 모든 건 내가 원강 작가라는 타이틀을 탐냈기 때문이라고. 좋은 기회를 타인에게 쉽게 넘길 수 있는 배포를 가진 사람을. 그런 사람의 본질 자체를 나의 것이라 착각했던 것, 그뿐이라고. 그러니 더는 그가 내게 베푸는 선행의 의도를 찾지 않기로 다짐했다. 겉으로는 말이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카페에 들르기로 했다. 난 회사 맞은편의 개인 카페로 향했다. 그런데 카페는 하루 사이 간판을 떼어낸 것 같았다. 정확히는 간판 아래로 내부 공사 안내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자세히 읽어 보니 카페가 프랜차이즈로 바뀐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평소 그곳을 애용해왔다. 회사 건물 1층에도 프랜차이즈 카페가 있었지만, 그곳은 개인 카페보다 값이 비쌌고 원두의 탄 맛도 심했다. 그런데 하필 바뀐다는 프랜차이즈가 회사 1층과 같은 상호였다. 신호등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래도 되나 싶어 나는 개인 카페로 들어갔다. 사장님에게 자초지종을 꼭 물어야 할 것만 같았다. 사장님은 평상시와는 다르게 가라앉은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현수막 이야기를 꺼내자 주인이 바뀔 예정이라고 했다. 그동안 메뉴판을 밖에 걸어놓지 않았던 게 후회된다고. 사람들은 맞은편 프랜차이즈 카페보다 여기가 더 비싼 줄 안다고. 때마침 오른 임대료에 한계가 왔을 뿐이라며 사장님은 아메리카노를 건넸다. 오늘만 공짜예요. 다음부턴 아예 없을지도 모르니까요. 값을 치르지 않은 음료였지만 맛은 평소보다 배로 쓰고 텁텁했다.
  신호는 한동안 빨간불이었다. 원강 작가는 나보다 두 보 뒤에서야 나왔다. 아마 사장님에게 음료값을 건네주고 온 것 같았다. 회사 건물로 들어서며 나는 왜 내가 얼굴도 모르는 건물주를 비난하고 있는가를 곱씹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무래도 나는 급격하게 변화하는 무언가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것 같다고. 마지막 화를 작업하던 주간에 작업실 앞 편의점의 직원이 여자에서 남자로 바뀌었던 적이 있었다. 나는 매번 비슷한 시간대만 골라 그 편의점을 방문했었다. 문을 열면 언제나 라면 국물이 스며든 조끼를 입고 인사를 건네던 여직원이 있었다. 여직원의 편안한 웃음을 나는 좋아했다. 그런데 그날은 여직원이 보이질 않았다. 대신 반듯하게 다린 새 직원복을 입은 남성이 인사를 건넸다. 이상하게 나는 계산대에서 남직원을 마주 보는 일이 어려웠다. 진열대를 돌아다니는 내내 이런저런 생각들로 얼굴이 굳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여자 내 또래로 보였었는데. 일이 힘들었었나. 편의점은 잠깐 하던 아르바이트였던 걸까. 원래 전공은 뭐였을까. 새 직장을 찾기라도 한 걸까. 찾는 물건이 있었지만 나는 끝까지 물어보지 못하고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카페에 들어섰던 순간에도 비슷한 질문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부유했다. 사장님에 대한 걱정, 참견으로 뒤섞인 그것들은 아마 한동안 나를 괴롭힐 것이다. 못된 심보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인정하기 싫었던 것 같다. 새롭게 변하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간에. 그것들은 언제나 빠르게 달리고, 내게 와선 이질적으로 스며드는 것들이다. 그러니까 맞은편의 카페가 곧 프랜차이즈 카페로 바뀌면 나는 그쪽 길목으로는 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이른 오후 다시 찾은 옥상은 전날에 비해 한적하고 빈 풍경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화려하게 장식된 빨간 풍선이 눈에 띄었다. 옥상 안쪽은 제법 소란스러웠다. 파티의 흔적을 떼어내는 사람과 새 행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엉켜 있는 탓이었다. 모두 2시부터 열리는 사인회를 준비하는 듯했다. 직원 두 명은 정중앙에 주저앉아 원형 무대의 인공 잔디를 떼고 있었다. 그들 중 하나는 파티에서 인사를 나눈 얼굴이었는데 전날의 흔적을 정리하느라 바빠 보였다. 곧 무대가 있던 자리엔 네모난 탁자가 들어섰다. 왜 그 광경에 아쉬움을 먼저 느낀 건지는 모르겠다. 순식간에 바뀌는 풍경이 신선하다기보단 낯설었다. 민경 언니는 옥상 난간에 있었다. 언니는 마른 생화를 떼어낸 자리에 금박 커튼을 이어 붙이고 있었다. 혼자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바빠 보여 말을 걸면 안 될 것 같았다.
  무영 씨는 언제봐도 명암을 참 잘 쓰네요.
  무대 주변에 날리는 쓰레기를 줍다 원강 작가와 마주쳤다. 그때 난 상반신을 바닥으로 비스듬히 숙인 상태였고 햇빛은 내 전신에 적절한 그림자를 씌우고 있었다. 식사에 이어 사인회에서까지 나는 원강 작가와 함께할 예정이었다. 그는 식사 전과는 다른 단정한 셔츠 차림에 구두를 신고 있었다. 샵을 들렀다 온 것인지 머리엔 연한 펌이 들어가 있었다. 원 작가와 말을 주고받는 동안 나는 자꾸 옷깃이나 잔머리로 손이 갔다. 다림질을 잊은 셔츠를 입고 온 터라 그게 신경이 쓰였다. 머리 손질도 익숙하지 않아 묶기만 했는데 그냥 푸를 걸 그랬나 싶었다. 원 작가는 몸을 뒤척일 때마다 목덜미에서 연한 장미 향을 풍겼다. 여성용으로 나온 향수와 비슷한 달콤한 향이었다.
  무영 씨. 너무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우선 사인회부터 무사히 끝내자고요. 다 잘될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원강 작가는 나에게 민트맛 사탕을 건넸다. 그걸 무의식적으로 입에 넣으며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를 정말 모르겠다고. 난 그가 겉치레로 막말을 내뱉는 사람이 아님을 알았다. 그런데도 그의 모든 말을 왜곡하는 버릇이 자꾸만 튀어나왔다. 확실한 건 그가 뱉는 모든 말이 나에겐 어떠한 위로로도 작용하지 않음은 분명했다. 그와 내가 다르다는 걸 나는 어떤 식으로든 느끼고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 나와 사담을 주고받다 한 직원의 부름에 급히 자리를 옮겼다. 그의 뒷모습을 보다 나는 어깻죽지에 코를 갖다 대고 냄새를 맡았다. 그곳에선 옷장 특유의 습한 나무 냄새가 났다. 이따 민경 언니의 향수라도 빌려야 할 것 같았다.

  그러니까 왜 하필 회귀냐고요.
  내 팬이라고 할 수 없는 사람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미리 생각해 둔 말은 많았는데 뭐부터 내뱉어야 할지 몰라 혀가 굳었다. 사인회가 시작된 지 오 분 만의 일이었다.
  그 여자는 분명 적극적인 팬으로 보였다. 옥상 벽면의 대기 줄에 첫 번째로 서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두세 번 다린 듯한 정장 바지 안쪽으로 하늘색 와이셔츠를 넣어 입은 말끔한 차림으로 말이다. 여자는 삼십 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보였다. 50명 정도 되는 사람들 사이 유독 눈에 띄는 이국적인 얼굴이었다. 내 쪽으로 가까이 오면 시원하고 톡 쏘는 향수 냄새를 풍길 것만 같았다. 지정 좌석에 앉아 이면지에 자필 서명을 연습하는 와중에도 나는 여자와 계속 눈이 마주쳤다. 사인회가 시작되자 여자의 걸음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내 앞으로 와 멈췄다. 그리고 내가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여자의 목소리가 두 고막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왜 회귀물인가요?
  네?
  하고 많은 장르 중에서 왜 하필 회귀냐고요. 그건 현실성이 하나도 없잖아요.
  나는 사인회에서 발생할 수 있는 수만 가지 질문에 대한 루트를 그려본 적 있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내 팬에 한정된 답변들이었다. 같은 질문일지라도 내 팬이 아닌 사람에게는 내 팬인 사람에게 하는 답과는 다른 것을 내놓아야 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내가 사전에 준비한 답변 몇 가지로 회귀라는 단어를 포장하려 했지만 잘 먹히지 않았다. 여자는 자동응답기처럼 왜 회귀냐고요, 하며 점점 언성을 높이기만 할 뿐이었다. 원강 작가는 처음엔 잠자코 내 답변을 기다렸다. 그러나 내가 말을 흐리자 곧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에게로 향했다. 여자는 원강 작가가 다가오자마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가려진 손 사이로 드러난 얼굴이 조금 붉어 보였다. 여자는 원강 작가가 내민 손을 잡고 그와 오랜 대화를 나누었다. 여자는 원강 작가의 목소리에 손뼉을 치기도 하고 입천장이 보일 정도로 크게 웃기도 했다. 두 사람의 말이 지속되는 동안 원강 작가의 어깨나 팔뚝엔 여자의 손이 가 있었다. 곧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챈 민경 언니가 경비원을 불러 여자를 내쫓았다. 그러나 이미 옥상 내의 분위기는 어수선해진 상태였다. 나는 나머지 팬을 살피기 시작했다. 대기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입을 뻐끔거리며 괜찮으세요, 같은 위로를 건넸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여자의 질문을 얼버무린 나에게 실망한 듯한 기색이었다. 글 작가도 답변하지 못한 난관을 그림작가가 해결했으니 말이다. 민경 언니는 여자가 내려가자 옥상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대기 줄을 둘러보다 내 귓가에 조용히 질문했다.
  그래서 원강 작가는 그 여자한테 뭐라고 했대?
  회귀는 과거로 돌아가지 못하는 대중의 만족을 위한 장르…현실성이 없기에 가상에서 더욱 빛나는 것…이라고요.
  원강 작가는 저걸 어떻게 기억하는 걸까. 그건 연재 초기 원강 작가의 작업실에서 내가 흘리듯 말한 문장이었다. 그마저도 정돈이 덜 된 상태로 정신없이 쏟아낸 말이었다. 분명 작품을 공모전에 낼 당시에는 내가 왜 회귀물을 선택했는지의 이유가 명확했다. 그런데 막상 연재를 시작하고 보니 희미한 부분이 되었다.
  사인회는 잠깐의 재정비 시간을 가진 후 계속되었다. 팬의 반을 떠나보내고 나서야 모두에게 20분간의 휴식이 주어졌다. 그동안 난 테이블 한쪽에 쌓인 종이 더미를 뒤지기 시작했다. 종이는 민경 언니가 질문 참고용으로 가져다 둔 것이었다. 그곳에 내 초창기 발상 노트도 있었다. ‘모든 게 평범했던 소녀에게 어느 날 아주 특별한 행운이 찾아온다면’. 그건 발상 노트의 맨 앞장에 새겨진 문장이었다. 발상을 처음 시작했을 때 나는 회귀가 행운과 같은 거로 생각했다. 생과 사를 98번 반복하는 주인공을 보는 일이 달갑지 않다는 걸 그땐 몰랐다. 작업을 하다 내가 98번씩 죽었다 살아나는 모습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러면 모든 게 아득해지기만 했다. 다시 살아난다는 것에 벅차거나 홀가분한 감정은 없었다. 서연이도 나와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난 분명 주인공이 원치 않는 구간에서 잠들면 곧바로 원점으로 회귀할 수 있으리라 설정했다. 그러나 민경 언니의 의견은 달랐다. 언니는 주인공이 확실하게 죽을 장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언니의 제안에 서연이는 회차가 거듭될수록 점점 잔인하고 안쓰러운 방식으로 죽어야만 했다. 교통사고, 묻지마살인, 납치 등의 자극적인 소재로 서연이의 사인은 더럽혀져 갔다. 그래야 많은 독자를 모을 수 있다고 언니는 말했다.
  누군가 주인공 이름이 왜 서연이냐고 물으면 난 그게 흔하고 평범했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나는 웹툰 속 서연을 평범한 외모와 평범한 가족을 가진 고등학생으로 설정했다. 서연이의 외모는 한때 인터넷에서 화제였던 사진을 참고해 그렸다. 그 사진엔 얇고 둥근 안경을 쓴 긴 생머리의 여자가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는 모습이 담겨있었다. 인터넷에서는 그 사진이 ‘교회 언니’로 불린다고 했다. 웹툰 속 평범함의 기준은 어떤 집단 하나가 있다고 할 때 그 집단에서 가장 밑바닥도, 위 서열도 아닌 평이한 선상에 놓인 사람으로 생각했다. 사람을 계급으로 나눈다는 것이 기괴하다는 걸 안다. 그러나 서연이는 내 사심을 잔뜩 끌어안은 인물이어야 했다. 때론 최하층의 사람보다 적당히 가난하고 적당히 평범한 사람이 더 강렬하게 현실을 부정하기도 한다. 나는 서연이를 통해 그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계급사회는 필연적인 요소였다.
  현실에서는 한 번의 역경이 닥치면 다시 올라서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내가 첫 월급을 거머쥐었을 때 난 원치 않는 가장의 운명으로 들어선 거나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에 본가에 전화를 걸었다가 몰랐으면 좋았을 이야기를 들어버렸다. 부모님이 운영하던 동네 상가의 과일가게가 반년 동안 적자를 기록했다고 했다. 그 사실을 여태 나에게 숨기다 첫 월급 소식에 털어놓은 것이었다. 이전에 부모님은 집 근처 사거리에서 배달 전문 분식집을 창업했었다. 과일가게는 분식집이 망하고 유동 인구가 많은 길을 노려 새롭게 시작한 가게였다. 아빠한테 이번엔 대체 뭐가 문제였는데요 하고 물었다. 아빠는 사람들이 가게를 잘 찾지 않아 싱싱한 과일이 상하는 모습만 지켜본댔다. 또 사람도 문제지만 체력도 문제라고 했다.
  매일 새벽 4시에 도매시장에 가는 건 생각보다 벅찬 일이지. 그건 꽤 무료하고, 반복적이고, 무의미한 일이란다.
  난 왜 그걸 못 견디는데요, 하고 되묻고 싶었다. 그 뒤에 엄마 아빠는 어른이잖아요. 하고 소리치고도 싶었지만 속으로 깊이 삼켰다.
  발상 노트의 아무 페이지나 펼쳤는데 그곳에 썩은 복숭아가 그려져 있었다. 그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기까지 노트의 곳곳에 썩은 과일들이 낙서처럼 새겨져 있었다. 나는 원강 작가의 눈치를 보며 팔뚝으로 노트를 가렸다. 그건 서연이를 살리고 죽이는 밤마다 내가 어쩔 수 없이 떠올리고 마는 것들이었다. 모두 연필로 그린 거였지만 세밀하게 묘사돼서 벌레가 꼬일 법도 했다. 흑백 그림에서 피어오르는 썩은 단내를 나는 분명히 맡았다. 짓무른 과일처럼 흘러내리는 부모님의 얼굴. 날파리가 벽지처럼 달라붙어 있을 가게의 단면. 그건 모두 속으로만 상상하다 끙끙 앓는 것들이다. 부모님도 서연이처럼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난 매달 일정한 금액을 떼서 부모님에게 보냈다. 대신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내 욕망은 서연이를 통해 몇 번이고 펼치고 접었다. 회귀란 과거의 상처, 사건으로부터 나 자신을 공정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품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일 말이다. 애초 무언가를 그리워한다는 감정은 그 무언가로 돌아갈 수 없거나, 돌아가기 어렵다는 걸 알기에 파생되는 감정이다. 그러니까 사람을 몇 번이나 수평선에 도달하게끔 하는 가상의 능력에 나는 여태껏 매달려 버텨온 것이었다.

  사인회가 끝나자마자 총괄 PD가 나를 불러세웠다. 그때 난 민경 언니와 옥상 난간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언니는 PD를 보자마자 시선을 피했다. 그리곤 내 어깨를 토닥이며 계단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이 평소보다 왜소하게 느껴졌다. PD는 내게 둥글게 말린 종이 다발을 내밀었다. 종이를 펼쳐보니 민경 언니에게 보낸 99화의 글과 그림이었다.
  이래선 99가 드러나질 않아요. 여기엔 마지막이랄게 없잖아요. 서연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정도는 확실하게 보여주고 끝내야죠.
  PD는 다섯 개의 그림을 차례대로 한 컷씩 가리켰다. 이대론 도저히 업로드가 불가하다고 했다. 수정해서 올리든 아예 한 주 휴재로 가고 원강 작가에게 다시 맡기든 하라며 그는 소리쳤다. PD가 옥상을 벗어나자마자 나는 원강 작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받지 않았다. 나는 종이 다발을 손에 쥐고 서둘러 옥상을 내려갔다. 그리고 민경 언니의 자리로 달려갔다. 언니의 노트북 앞에 앉자마자 나는 메일함부터 뒤졌다. 그곳엔 수정 파일이 쌓여있었다. 수정 과정에서 내가 놓친 부분이 있었는지 찾고 싶었다.
  저 별은 그냥 별이 아니야. 지구와 충돌하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소행성이지.
  그건 민경 언니로부터 온 마지막 답신이었다. 99화의 마지막 컷에 그린 별이 너무 흐릿하니 반짝이는 효과를 가득 넣어달라는 것이었다. 이후로 다른 수정 요구는 없었다. 언니로부터 오늘 자정에 정상적으로 업로드될 거란 말까지 전해 들었다. 당시 난 민경 언니가 유독 마지막 원고를 붙잡고 늘어지는 것이 미심쩍었다고 생각했었다. 언니는 여태 불필요한 수정은 요구한 적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민경 언니에게 보낸 다섯 개의 그림을 찬찬히 훑기 시작했다.
  해방: 내가 줄곧 전하고 싶었던 무언가.
  그건 99화의 첫 장면에 작은 손 글씨로 새겨넣은 글이었다. 99화는 잠에서 깬 서연이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그림으로 시작된다. 이어지는 두 번째 장면에서 서연이는 빨간 구두와 흰색 원피스를 걸친 채 현관 밖으로 나간다. 의상에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그냥 99화를 작업하던 순간에 내가 가장 입고 싶었던 옷을 그린 거였다. 장면이 전환되는 세 번째 장면의 뒷배경으로 나는 야자수와 주홍빛 석양을 그려 넣었다. 민경 언니가 나와 술을 마실 때마다 하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그림 속에 인물은 없었다. 오직 공간만 존재했다. 네 번째 장면에 나는 어느 해안가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서연이의 옆모습을 그려 넣었다. 바람에 날리는 서연이의 까만 머리카락을. 서연이의 전신에 드리워진 노랗고 검은 그림자를. 노을이 지는 순간 역광을 정통으로 맞은 서연이의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서연이의 전신은 모든 컷에서 푸른 빛에 둘러싸여 있었다. 원강 작가를 보조하면서 나는 빛의 방향으로 인물을 숨 쉬게 할 수 있음을 배웠다. 서연이에게 씌운 명암은 날이 저물어도 밝을 서연이의 영혼을 상상하며 넣은 것이었다.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흰 바탕 한가운데 가로로 선을 그었다. 그리고 위쪽에 은하수를, 아래쪽엔 바다를 채워 넣었다. 서연이는 그 경계선의 가장자리에서 두 팔을 벌리고 있었다. 이때 다리 부분은 일부러 그리지 않고 컷 밖으로 잘라냈다. 서연이가 바다로 추락하고 있는 것인지. 여전히 땅에 발을 붙인 채 두 팔만 벌리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공중에 떠 있는 상태인 건지. 서연이와의 이별은 아무도 모르게, 나조차도 모르게 보내주고 싶어서였다. PD가 지적한 부분은 바로 여기였다. 나는 여전히 어느 부분을 수정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99화가 띄워진 노트북 화면에 민경 언니의 얼굴이 비쳤다. 발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에서 불쑥 캔 커피 하나가 튀어나왔다. 내가 그걸 다 비울 동안 언니도 책상에 걸터앉아 텀블러 한 통을 다 비웠다. 언니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천천히 입을 뗐다.
  있지, 난 서연이를 죽이고 싶지 않았어.
  메일에서는 언니 표정을 읽을 수 없어서 몰랐어요. 근데 지금은 알 것 같아요.
  그럼 됐어.
  그 말을 끝으로 언니는 책상의 서랍을 모조리 열었다. 그리고 짐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언니를 지켜보던 뒷자리 직원이 언니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민경 씨…정말 가시려고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민경 언니의 책상 구석에 놓인 두 개의 상자가 눈에 띄었다. 상자를 본 순간 언니보다 언니의 노트북으로 먼저 손이 갔다. 회사 홈페이지의 관리자 창으로. 그 페이지의 업로드 목록으로. 멋대로 마우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직감이 맞았다. 분명 자정까지는 한참 남은 시각인데 목록 상단에 99라는 숫자가 뚜렷하게 보였다. 언니는 PD와의 상의 없이 멋대로 내 웹툰을 올려버렸다. 회사라는 집단에서의 단독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생각하면 나는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언니 정말 왜 이래요.
  무영아, 집으로 가 있어. 다 잘될 거야.
  다행히 PD는 원강 작가와의 미팅 건으로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어쩌면 원강 작가가 PD를 붙잡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 순간만큼은 원강 작가가 간절하게 보고 싶었다. 그가 다 잘될 거라고 다시 한번 내 앞에서 말해주기를 바랐다.

  오피스텔에 도착하자마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베란다로 나갔다. 오늘 비가 온다고 했었나. 나는 살갗으로 스며드는 비를 가만히 만지고 있었다. 밖은 이른 새벽 같았다. 나지막한 풀벌레 소리가 빗방울과 뒤섞여 더없이 차분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마치 온 세상이 나를 감싼 그대로 정차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끝이야. 드디어 끝이 났구나.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고개를 들자 굵은 빗줄기가 아래에서 위로 역행하듯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그 수많은 빗줄기 사이로 나는 어렴풋이 반짝이는 무언가를 보았다. 검은 평면처럼 드넓은 하늘에 움직이는 점 하나가 찍히는 광경이었다.
  소행성인가.
  지구와 부딪치지 않으려 발버둥을 치는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다. 고개를 들어야만 볼 수 있는 것. 그건 눈가루처럼 반짝였다.

  눈을 뜨니 오른쪽 팔뚝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베란다에 기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동안 핸드폰은 고요했다. PD와 민경 언니, 원강 작가 누구에게도 연락은 없었다, 셋 중 누구에게 가장 먼저 전화를 걸지 고민하는데 현관문에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여니 문틈 사이로 큼지막한 상자 두 개가 보였다. 상자에 가로막힌 문이 저절로 닫히려고 하는 순간 누군가의 팔이 문틈으로 끼어들었다. 민경 언니였다.
  민경 언니는 미끄러운 복도 위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나는 언니를 부축해 현관으로 들여왔다. 언니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머리카락과 허리춤에서 잿빛 물을 짜냈다. 우산 없이 걸어온 모양이었다. 민경 언니는 상자 박스를 현관 안쪽으로 들고 옮겼다. 그때 빗물에 젖어 찢어진 상자의 하단에서 종이 더미가 수북하게 쏟아졌다.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진 이면지 사이로 익숙한 단어 하나가 보였다. 원강. 그건 종이 모서리에 조그맣게 적힌 글씨였다. 난 그걸 빼서 읽었다. 종이 상단에는 제1회 원탑 공모 기획이란 문구가 박혀 있었다. 문구 오른쪽에는 도장 하나가 찍혀 있었는데 날짜를 보니 12년 전이었다. 언니는 이걸 어떻게 보관하고 있던 걸까.
  그거 작가님 자리에서 훔쳐 온 거야. 너한테 도움 될까 싶어서.
  원강 작가님도 공모전 출신이신지 몰랐어요.
  회사 사람들 말곤 잘 몰라. 따로 기사가 나간 적도 없으니까.
  종이는 썼다 지우기를 반복한 듯 보이는 문장이 빼곡했다. 글씨체는 내가 아는 원강 작가의 필기체에 비해 둥글었다. 어린 티가 나는 것 같았다. 내가 모르는 원강 작가의 모습으로 물든 빛바랜 종이. 빗물에 젖은 원강 작가의 어린 시절. 마음이 복잡했다.
  언니가 화장실에 간 사이 나는 테이블을 폈다. 그리고 그 위에 비닐봉지 안 내용물을 차례대로 펼치기 시작했다. 봉지에는 맥주 열 캔과 마른오징어, 흰 플라스틱 용기가 들어있었다. 잠시 뒤 내 옷을 빌려 입은 민경 언니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언니는 침대맡에 수건을 깔고 그 위에 주저앉았다. 언니는 흰색 용기의 랩을 뜯으며 말했다.
  이건 김피탕. 네가 좋아하는 거야.
  나는 김피탕이라는 음식을 자주 먹었다. 그건 일반적인 탕수육 위에 김치와 치즈를 장식해놓은 요리였다. 사실 맛있어서 먹기보다는 그 겉모습에 이끌렸다고 보는 게 맞았다. 영롱한 빛을 뽐내며 옅은 김을 뿜어내는 모습이 작은 예술작품을 보는 것 같아 좋았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플라스틱 용기를 열자마자 가득 피어오르는 연기 냄새가 상한 돼지고기처럼 울렁거렸다. 꼭 누군가 먹다 남긴 음식물을 한데 모아 놓은 것 같았다. 나는 김피탕 용기의 뚜껑을 덮어 그것을 언니 앞으로 내밀었다.
  저번엔 마라탕이 유행하더니 이번엔 김피탕이네요. 얘도 금방 시들겠죠? 전 벌써 좀 질렸나 봐요.
  난 나름대로 분위기를 밝히려 했다. 민경 언니에게 빨리 PD와의 후일담을 묻고 싶었다. 그러나 민경 언니의 안색은 빗물이 고인 듯 어두워서 나는 쉽게 운을 뗄 수 없었다. 언니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가끔 추운 듯 양팔을 비비다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기만 했다. 민경 언니는 맥주캔을 집어 들었다. 동시에 김피탕 뚜껑을 열더니 치즈를 잡아 늘이며 말했다.
  나 주말에 떠날 거야. 하와이로.
  전에 말했던 거기로요?
  응.
  PD랑은 어떻게 됐는데요?
  돌아오래. 다시.
  언니는 태평하게 늘어진 목소리로 한참 동안 말을 했다.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하느라 그걸 한 귀로 흘렸다. 그동안 언니는 무영아, 무, 영하면서 내 이름을 두세 번 반복해 불렀다. 그래도 반응이 없자 내 얼굴에 핸드폰 화면을 냅다 갔다 댔다.
  너 99화 댓글 창 아직 안 봤지? 독자 반응이 생각보다 좋아.
  나는 댓글을 하나씩 정독했다. 좋아요 수가 많은 베스트 댓글이 스무 개 정도 되었다. 그중 열두 개는 다섯 번째 장면에 대한 해석이었고 일곱 개는 원강 작가에 대한 칭찬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가장 좋아요 수가 많은 댓글로 맨 상단에 고정돼 있었다. 거기엔 내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무영 작가님 완결 축하드려요. 이름이 생소한 걸 보니 신인이셨나 봐요. 숨어있는 원석을 발견한 기분이에요. 차기작 기다릴게요.
  민경 언니는 미라처럼 빳빳해진 내 정수리에 한쪽 손을 올렸다. 그리고 정전기가 날 때까지 뜨겁게 문질렀다.
  봤지?
  분명하게 봤어요.
  이제 뜰 일만 남았어.
  그렇지만 언니는 회사로 돌아가지 않을 거잖아요.
  그래. 넌 위로. 난 하와이로. 서로 다른 방향으로 뜨면 되지.
  뜨다. 뜬다. 떴다. 꼭 가라앉겠단 소리처럼 들려요. 실감이 안 나요 언니.
  민경 언니와 나는 맥주캔을 부딪치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맥주 한 캔을 비울 동안 언니는 PD를 사수로 만난 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언니는 그 시절을 잠과 옷을 포기하면서 저축하던 패기 가득한 나이라 회상했다. 그런데 막상 다녀보니 회사는 언니의 생각과는 다른 곳이었다고 했다. 언니는 회사를 석 달만 넘기면 모든 감각이 무뎌지는 곳이라 표현했다.
  난 우리 부서에서 계속 막내였어. 입사 삼 개월째에도. 삼 년 차에도.
  사람이 좋아도, 일이 적성이어도 여유라는 건 언니를 찾아오지 않았다. 네자릿수를 찍은 통장 잔고 앞에서 미소 짓는 법을 잊었을 때, 언니는 그걸 확실하게 깨달았다고 했다. 나는 언니가 걱정됐다. 나에게 언니는 적어도 PD보단 유능한 사람이었다. 사람마다 보고 들으며 자라온 환경은 다르기에 그 거리를 좁히는 건 쉽지 않다. 그러나 언니는 연재 내내 내 관점에서 서연이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지금의 모든 상황도 내 입장으로 바라보는 게 아닐까 싶었다.
  언니 혹시요….
  아냐 그런 거.
  …그런 게 뭔 줄은 알고요?
  여행. 그건 더는 미뤄서는 안 될 만남 같은 거야. 그래서 떠나는 거야 나는.
  언니는 세 번째 맥주캔을 따 그걸 한 모금 들이켰다. 가끔 수정을 마친 밤이면 언니는 퇴근길에 내 작업실로 맥주를 사 들고 왔다. 그리고 맥주를 마셨다 하면 항상 하와이 이야기를 꺼냈다. 언니의 이야기는 맥주 세 캔이 비워질 무렵부터 시작되는 거였다. 그러니 곧 하와이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난 귀를 열어둔 채 잠자코 언니의 입을 바라봤다.
  하와이에 가서 몇 년간 살 거야. 별다른 이유는 없어. 그냥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도 살아보고 싶어서 그래.
  언니의 이야기에선 먼저 미풍에 몸을 떠는 야자수가 등장했다. 매번 듣는 이야기였지만 이번엔 어감이 달랐다. 언니가 입을 열 때마다 풍기는 비릿한 알코올 냄새에 바닷가가 떠올랐다. 언니의 나른한 목소리 속에서 눈앞에 모래사장이 펼쳐졌다. 언니는 늘어진 살 하나 없이 완벽하게 가꾼 비키니 자태를 뽐내며 선베드에 누워있다. 그때 정체불명의 남성이 금발을 휘날리며 언니 앞으로 다가간다. 그 남성은 파란 눈동자에 매혹적인 아이홀을 가진 사람으로 누구나 한번은 꿈꿨을 첫사랑의 모습과도 닮아있다. 이때 남성은 첫눈에 반했다며 언니에게 한 손에 들고 있던 핫도그를 건네준다. 결론은 그냥 두 남녀가 운명적인 사랑을 속삭인다는 내용이다. 내가 왜 하필 핫도그인 건데요, 하고 물으면 언니는 네 번째 맥주캔을 따며 그냥 외국인이 든 거니까. 잘생긴 외국인, 뭔가 있어 보이잖아, 하고 답할 뿐이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이야기에서 언니는 외국인과 수평선 너머로 지는 노을을 바라보고 있다. 에메랄드빛 수면에 석양이 살포시 녹아내리는 순간을 뒷배경으로 두 사람의 입술은 포개진다. 검은 실루엣만을 남긴 채로. 진한 키스. 달겠지. 근데 이건 너무 쓰다. 하고 중얼거리는 언니가 흘러넘치는 맥주 거품을 게걸스럽게 핥아먹고 나면 하와이의 환상은 끝이 난다. 맥주 네 캔에 알딸딸해진 언니가 코를 풀며 말했다.
  난 어른이 되면 저절로 돈이 생길 줄 알았어. 영화 같은 사랑도 생길 줄 알았고.
  하와이 이야기는 5살의 언니가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이 원작이라고 했다. 언니가 아는 하와이는 어릴 적 보았던 3초간의 프레임 한 컷이 전부였다. 지는 노을을 배경으로 진한 키스를 나누는 모래사장의 커플. 그 단면이 언니의 머릿속에서 하와이 낙원 이론을 창조해냈다고 했다. 언니는 아직도 그 영화의 제목을 찾고 있다고 했다. 뻔한 결말이 예상되는 B급 영화인 것 같았다고 언니는 말했다. 기억하는 건 오직 3초간 스쳐 갔던 그 장면 하나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3초는 내가 매달 돈을 저축하게끔 한 이유였어.
  어느 정도 취기가 올랐을 무렵. 언니는 허공에 젓가락을 휘적거리며 내 낙원은 뭐냐고 물어왔다. 나만의 낙원. 하루를 시작하고 끝내기까지의 원동력. 반복되는 일상의 안식처가 되는 어떤 것. 근데 그런 게 나에게 있었나. 나는 아직 비우지 못한 맥주캔을 어루만지며 언니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손톱 사이로 차가운 물방울이 스며들 때마다 두 관자놀이도 차가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휘청이는 언니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그런데요 언니, 가장 오래된 기억은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기억이래요.
  얼마 지나지 않아 김피탕 용기는 바닥을 보였다. 나는 맥주캔에 생긴 성에를 문지르며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언니는 나를 보며 걱정하지 말라는 둥 내가 다 보장하겠다는 둥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맥주캔 아홉 개를 줄지어 구겨놓은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나는 라디오를 청취하듯 언니의 목소리를 가만히 주워 담고 있었다. 언니가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듯 조목조목 말을 잇는 것에 안심이 됐다.
  나는 언니가 하와이에 가서도 종종 연락을 주기를 바랐다. 그런데도 민경 언니와의 관계가 언제든 부식되기 쉬운 거라고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랬다. 얼마든지 이어지고 끊어질 다짐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던 건. 빠르게 변하는 무언가에 이질적인 기운을 느끼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그걸 받아들이는 일이 자연스러웠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스며드는 대로 놔두면 사라지는 무언가를 향한 그리움도 사그라들곤 했다. 사회적 관계…사무적 관계…. 사회라는 것이 그렇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올 때면 언제나 아린 기운을 풍기게 된다.
  사람이라는 게 다 그런 거야. 오래 가는 관계보다는 오래 버티는 관계라고 보는 게 맞아.
  민경 언니는 그 말을 끝으로 깊이 잠들었다. 내가 나도 모르게 밖으로 무언가를 내뱉은 것 같다. 아쉽다거나, 언니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거나 하는 혼잣말을. 민경 언니 말에 내가 왜 고개를 숙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언니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나는 끝까지 내 표정을 숨기고 싶었다.
  언니는 동이 틀 무렵까지 잠에 취해있다 집으로 돌아갔다. 현관을 나서는 순간에도 언니는 내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엉망인 머리를 매만지며 잘 지내라는 담백한 인사만을 건넸을 뿐이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시간이었지만 깊은 포옹이나 진실한 속마음을 나누는 시간은 없었다. 대신 나는 언니의 얼굴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이상하게 그 흐릿한 인사가 나는 더 좋았다.

  약속된 주말에 언니는 떠났다. 토요일 아침 주고받은 1분가량의 전화가 내가 들은 언니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나는 공항으로 가지 않았다. 분명 사무적이지 않은 언니의 친구가 나 대신 언니를 배웅해줄 거로 생각했다. 민경 언니가 떠나고 난 후 PD로부터 메일이 왔다. 독자 반응이 생각보다 좋았다고. 수고했다면서 5컷 회귀 시즌 2를 연재할 생각이 있냐 물어왔다. 물론 글과 그림 모두 내가 맡아서 말이다. 그러나 나는 서연이를 다시 불러올 생각이 없었다. 무엇보다 혼자 모든 걸 떠안기엔 체력과 경험이 부족할 것 같았다.
  저녁쯤에는 원강 작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후기를 어떻게 구상할지 방안을 물어왔다. 난 원강 작가로부터 통화 내내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하지만 통화가 끝나기까지 그 문장은 나오질 않았다. 그래서 이번엔 내가 먼저 물었다.
  저에게 주신 어시스던트 제안 아직 유효할까요?

  PD에게 남긴 답신은 한 줄이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99는 더없이 깔끔한 마지막이었다고 저는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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