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끄고 개방현
오정주
용휘는 악보집에서 눈을 뗐다. 타이레놀을 두 알이나 먹었는데도 두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무릎 위에 얹었던 베이스 기타를 스탠드에 내려놓았다. 허벅지에 실렸던 사 킬로그램 즈음의 무게가 사라지자, 다리 한쪽이 이상할 정도로 가볍게 느껴졌다.
개인 연습실 밖에서 다른 학생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한 덩어리로 뭉쳐 용휘가 앉아 있는 연습실 쪽으로 가까워지더니, 이내 학원의 출입문을 향해 멀어졌다. 용휘는 그것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왜 웃음을 터뜨렸는지,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즐겁게 했는지, 알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학생들의 목소리는 한데 뭉쳐 알아들을 수 없는 소음이 되었다.
소음.
사람의 목소리는 용휘가 연주하던 악기에 비해 너무 높고, 부정확해서 잘 잡히지 않았다. 머리가 아팠다. 용휘는 세워 둔 베이스를 향해 손을 뻗어 현을 훑었다. E, A, D, 그리고 G. 앰프에서 낮은음이 차례로 울렸다. 현의 진동이 멈추자 용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중얼거렸다. 집에 갈 시간이야. 그렇게 말하면 용휘는 집이었다. 집에 있었다.
악보집에 얼굴을 처박았다. 음표가 코앞으로 가까워지자 초점을 맞추기 어려웠다.
지난달 용휘는 학원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왼쪽 발목을 심하게 삐었다. 베이스 기타를 등에 이고 버스에서 내리던 중 발을 잘못 디뎠다. 접질린 발목을 붙잡고 고통스러워하는 동안 버스는 용휘를 뒤로 하고 다음 정류장을 향해 출발했다. 늦은 밤이었고 외진 정류장이었다. 일으켜주거나 부축해줄 사람은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등 뒤의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낯선 남자 한 명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용휘를 바라보는 것 같기도, 신호등의 빨간 불을 바라보는 것 같기도 했다. 어두웠다. 도무지 일어날 수가 없었다.
앞으로 넘어졌으니 뒤로 멘 베이스가 망가지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발목보다는 악기의 안위가 더 걱정되었다. 용휘는 손을 들어 등을 더듬었다. 가방의 두꺼운 외피 때문에 그 자리에 베이스가 제대로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용휘는 일어나려다가 풀썩 주저앉았다. 어깨가 무거웠다. 용휘의 뒤로 바람 소리를 내며 쌩하니 지나가던 자동차들이 하나둘 멈춰 섰다. 신호등이 초록 불로 바뀌려는 것 같았다. 고개를 뒤로 돌리자 조금 전의 그 남자가 느린 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용휘가 주저앉은 쪽을 향해.
용휘는 덜컥 불안해졌다. 집에 갈 시간이었다.
적막.
남자의 크고 두꺼운 구두 굽이 아스팔트 바닥과 부딪치며 뚜벅뚜벅 내지는 뚜걱뚜걱, 하는 소리를 냈다. 이따금 바람이 불었다. 용휘는 통증을 참고 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휘청거렸지만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구두 굽 소리. 용휘는 그 소리가 낯익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구두는 많지. 많아도 너무 많다. 그런데 왜 하필 저 구두의 고유함을 알아들을 수 있다고 느끼는 걸까. 구두 굽 소리는 낮거나 높다고 할 수 없었다. 굳이 비유해야 한다면 드럼 소리. 수업 도중 셔플 리듬의 드럼 비트를 틀어놓고 연주한 적은 있었으나 무엇이 스네어, 무엇이 하이햇, 무엇이 킥, 그리고 또 무엇이 있는지는 몰랐다. 아무튼 저 소리가 스네어, 혹은 하이햇, 혹은 킥, 혹은 다른 무엇과 가까운 것 같다고 용휘는 생각했다.
용휘는 절뚝대며 걸었다. 걸으려 했다. 마음대로 되지 않았고 용휘는 어쩔 수 없이 버스 정류장의 의자에 앉았다. 남자는 뚜벅뚜벅 어쩌면 뚜걱뚜걱 걸어 다가오더니, 용휘가 앉은 정류장의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독한 담배 냄새가 잠깐 맴돌았다. 신호등이 빨간불로 돌아갔다.
불안이 가라앉자 접질렸던 발목이 심하게 아팠다. 조금 전 어떻게 걸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용휘는 주섬주섬 휴대전화를 꺼내 가족들의 연락처 중 하나를 눌러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일 수도, 아버지일 수도, 언니일 수도 있었다. 아무튼 그날 누군가는 전화를 받았다. 곧 데리러 가겠다고 말했으며 정말로 곧 데리러 왔다. 용휘에게는 그게 정확히 누구였는지 중요하지 않았으므로 잊어버렸다. 전화를 받은 사람이 세 사람 중 누구였든 그는 차를 몰고 용휘를 데리러 왔을 테니까.
집에 갈 시간이었다. 용휘는 악보집에 처박았던 고개를 다시 들었다. 뿌옇게 보이던 음표가 선명해지며 악보는 완전한 하나의 곡으로 돌아왔다. 두통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러나 발목은 이제 느리게나마 뛸 수 있을 정도로 나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용휘는 오선지를 수놓은 음표들이 너무 까맣고 깊다고 생각했다. 그것들이 각각 하나의 음만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베이스의 미덕은 일정한 세기와 정확한 박자로 연주하는 것에 있다는 말. 하나의, 반의, 반의반의, 반의반의 반 박자마다 하나의 음을 연주하는 일. 용휘는 그걸 어려워했다. 아무리 배워도 실력은 좀처럼 늘지 않았다. 치고 들어가야 하는 순간에 반드시 치고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용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정확한 타이밍. 그것을 언제나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든 아니든 집에 갈 시간이었다. 용휘는 앰프를 끄고 케이블을 뽑았다. 베이스 기타를 가방에 넣고 지퍼를 올렸다.
용휘가 다니는 실용음악 학원의 개인 연습실은 언제나 악기가 상하지 않도록 일정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했다. 정말 그런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학원 복도의 게시판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용휘는 바로 그 게시판을 지나 학원의 출입문을 열고 나갔다. 이마를 짚고 엄지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용휘의 발소리가 건물 복도에 울렸다. 그건 어떤 의성어로 표현하거나 악기 소리에 비유하기에는 너무 작고 보잘것없게 느껴졌다. 지난달 들었던 남자의 구두 굽 소리에 비하면.
용휘는 넘어진 이후로 학원에 갈 때 버스를 타지 않았다. 의사는 오래 걷는 걸 자제하라고 말했다. 발목이 낫기 전까지는 어머니, 아버지, 언니 세 사람 중 하나의 차를 타고 갔고, 돌아올 때도 그랬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의사는 이제 편한 운동화를 신고 걷는다면 조금 오래 걸어도 괜찮다고 말했다. 그 뒤로는 학원에서 집까지 왕복 한 시간 정도의 거리를 걸어 다녔다.
버스가 무서운 건 아니야.
용휘는 그렇게 되뇌었다. 그러면 왜 버스를 타지 않는가? 베이스 가방은 너무 무겁고, 커서 어깨에 멘 채 대중교통을 타기엔 불편했다. 하지만 그건 어머니, 아버지, 언니의 차도 마찬가지였다. 승용차의 뒷좌석은 좁고 낮아 가방을 넣고 꺼내기 불편했다. 용휘는 걷는 것을 택했다. 걸으면 걸을수록 발목이 점차 나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아지는 것을 넘어 튼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저 기분일 뿐이지만 용휘에게는 그게 중요했다.
무선 헤드폰을 끼고 집을 향해 걸었다. 두통 때문에 노이즈 캔슬링 기능은 켜지 않았다. 귀를 푹 덮은 오버 이어 디자인이 바깥의 소음을 어느 정도 가려주었다.
다시 소음.
용휘는 세상에 소리가 너무 많거나, 혹은 들을 수 있는 소리의 범위가 너무 넓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높고 부정확하고 너무 많은 소리.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전체 음량을 낮추거나 아예 끄고 싶었다. 어떤 공간의 온도와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다면 그런 일도 가능할 것 같았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세상이 조용해지기를 바랐다. 휴대전화를 무음 모드로 바꾸듯이.
정말 그럴 수 있다면 단 하나의 소리만 남기는 일도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용휘는 베이스 기타의 소리만 남기고 싶었다. 왼손으로 줄을 누르지 않고 칠 때 나는 음이 각각의 현으로 낼 수 있는 가장 낮은 음이에요. 개방현이라고 하는데요, 많이 쓰이니까 이름도 기억하셔야 해요, 용휘 씨. 오른손으로 현을 당겼다 놓기만 하면 나는 음. 그걸 남겨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용휘는 지난달 발목을 삔 버스 정류장을 지나쳤다.
혹은 지나치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횡단보도를 바라보았다.
치고 들어가고 싶었다. 그게 어려웠다. 정확한 타이밍. 그런 건 어떻게 맞추는 걸까. 수많은 가능성이 있었고 분명히 무언가를 선택했지만 그게 정확한 타이밍이었다고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기 어려웠다. 그래서 용휘는 자신이 한 선택을 잊기로 했다. 좋은 방식은 아니겠지만, 좋고 나쁜 방식을 판단하는 기준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뚜벅뚜벅 혹은 뚜걱뚜걱. 남자가 걸어왔다.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지 피우고 있지 않았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있었는지 손을 빼고 있었는지. 횡단보도를 초록 불일 때 건넜는지 빨간 불일 때 건넜는지. 용휘가 앉은 정류장의 옆으로 스쳐 지나갔는지 용휘에게 다가왔는지. 용휘에게 말을 걸었는지 걸지 않았는지. 주먹을 휘둘렀는지 휘두르지 않았는지. 발목을 붙잡았는지 붙잡지 않았는지. 이미 다친 발목이었는지 그가 다치게 한 발목이었는지. 용휘의 바지를 벗겼는지 벗기지 않았는지.
용휘는? 버스에서 내리다가 넘어졌는지 넘어지지 않았는지. 그저 정류장에 앉아 풀린 신발 끈을 묶고 있었는지 애초에 신발 끈은 풀린 적이 없는지. 어머니나 아버지나 언니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혼자 돌아가기로 했는지. 애초에 실용음악 학원에 등록했는지 아닌지. 발목을 다친 적이 있는지 없는지.
사실 그 어떤 일도 일어난 적 없는 것은 아닌지.
다시 적막.
집에 갈 시간이었다. 그건 분명했다. 용휘에게는 최선의 가능성과 최악의 가능성을 모두 가정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럼 너무 기뻐하지도 너무 슬퍼하지도 않게 되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인지 용휘는 알 수 없었다. 단 한 가지의 일만 일어났다는 사실. 용휘는 그게 어려웠다. 과거의 정확한 타이밍에 치고 들어온 어떤 일. 치고 들어가야 하는 순간에 반드시 치고 들어오는 음. 개방현이 좋았다. 왼손과 오른손의 타이밍을 동시에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왼손이 하는 일은 오직 뮤트뿐이니까.
모든 일을 일어났는지, 일어나지 않았는지로 판단하다 보면 머리가 아팠다. 그럴 때 용휘는 이 순간 자신에게 일어났거나 일어나지 않은 일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버스에서 내리다가 발목을 삔 시연. 베이스 기타를 치는 메이린. 정류장에서 신발 끈을 묶는 티파니. 담배 냄새를 맡는 하루카. 헤드폰을 낀 아이샤. 휘두른 주먹에 얼굴을 맞아 피를 흘리는 희정. 가족을 기다리는 알마. 대중교통을 타는 대신 걸어 다니는 쩌우. 성폭행을 당한 그레타. 용휘는 그들의 얼굴을 여러 번 본 듯이 생생하게 떠올렸다. 이것 혹은 저것으로 판단할 수 없는, 구체적인 이목구비를. 그러면 두통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는 알 수 없었고 오직 구두 굽 소리만이 분명했다. 뚜벅뚜벅 동시에 뚜걱뚜걱.
용휘는 세계의 소리를 껐다. 기계로 찍은 것처럼 오차 없이 치고 들어오는 베이스 소리만 남았다. 개방현 EADG만이. 각각의 현으로 낼 수 있는 가장 낮은 음이. 용휘는 낮아지고 싶었다. 한없이 낮아지고 싶었다. 바닥에 뺨을 대고 납작 엎드렸다. 시연과, 메이린과, 티파니와, 하루카와, 아이샤와, 희정과, 알마와, 쩌우와, 그레타와, 세계와 연결된 기분이 들었다.
소음이야 적막이야?
베이스 솔로잖아!

오정주, 한양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2학년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작가 인터뷰
Q. 작가님의 개방현은 어떤 건가요?
A. 다룰 줄 아는 현악기가 베이스 기타뿐이라서, 용휘와 같습니다. 4현 베이스의 개방현 EADG. 세계의 소리를 끈 뒤에 무엇을 남길지 묻는 거라면 저는 심장 소리를 남기고 싶네요.
Q. 세계를 끄고 개방현.이라는 제목이 좋습니다. 개방현은 우리가 알고 있는 문 등을 활짝 열다, 자유를 주다, 숨김이 없다는 뜻의 개방(開放)이지만, 현(弦)은 활과 악기 줄을 의미합니다. 현을 활이 아닌 현재로도 볼 수 있을 거 같다고 해석했습니다. 세계는 과거고, 결국 우리가 살았던 과거의 세계를 끄고 현재의 세상을 열다가 아닐까 했는데, 오정주 작가님은 어떤 세상을 끄고 왜 개방현이란 제목을 붙이셨는지 궁금합니다.
A. 제목에 대한 해석은 읽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것 같습니다. 저는 제 의도를 설명하기보다, 읽는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경우를 긍정하고 싶어요. 세계는 용휘가 ‘아예 끄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소음이 가득한 곳이지만, 동시에 시연, 메이린, 티파니…… 와 같이 용휘가 상상한 인물들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곳이기도 하잖아요. 마찬가지로 개방현도 누군가에게는 용휘처럼 베이스 기타의 개방현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바이올린, 첼로, 우쿨렐레의 개방현일 수도 있고, 더 나아가서 이 질문처럼 누군가에게는 현재를 여는 일로 읽힐 수도 있겠죠. 글의 주제가 불확실성의 연결인 만큼, 제목에 대한 해석도 가능성의 영역으로 남겨두겠습니다.
Q. 용휘는 두통이 매우 심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통제를 두 알이나 먹어도 쉽사리 두통이 낫지 않은 인물이 자주 걷고 오래 걷는 장면이 인상 깊었습니다. 단순히 대중교통이나 자가용을 이용하는 것이 불편하다고 했지만 악기의 무게를 이고 걷는 것 또한 상당히 힘들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작가님께서는 그럼에도 이 인물이 걷는 순간을 좋아하는데 그 이유를 무엇으로 설정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작가님은 주로 어떨 때 걸으시는지도 궁금했습니다.
A. 두통은 종류가 매우 다양한데다 검사를 해도 원인이 밝혀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이 용휘가 겪었거나 겪지 않은 일과 닮아있다고 생각했어요. 용휘의 두통이 바로 그 일로 인해 일어났을 수도 있지만, 그저 일상적인 수면 부족이나 스트레스 탓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 용휘가 두통을 감내하고 자주, 오래 걷는 것은 ‘점차 나아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고, 또 ‘그저 기분일 뿐이지만 용휘에게는 그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에 대응하기 위해 각자의 방식을 찾기 마련이잖아요. 고통을 해소하는 용휘만의 방식이 걷기라고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용휘가 걷는 것은 단순히 다리를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용휘가 자신을 둘러싼 불확실한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이기도 하다는 점에 의미를 두었습니다.
저는 사실 목적지로 이동하기 위해서만 걷는 것 같아요. 운동량을 채우기 위해 조금 더 오래 걷는 길을 선택할 때는 있지만, 시간을 내어 산책하는 일은 잘 없네요. 용휘의 걷기는 취미가 산책인 사람들을 향한 제 동경에서부터 비롯된 설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