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는 왜 갈라파고스 이구
<빠른 진행 속도>
피부과에 가야 할지 정신과에 가야 할지 고민을 하다가 결국에는 무난한 가정의학과에 왔다. 접수를 하려고 하자 간호사가 어디가 불편해서 왔는지 물었다. 나는 또 고민을 하다가 온몸이 아프다고 말했다. 간호사는 내 말을 듣고 독감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소파에 앉아서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다. 나는 회색의 네모난 코듀로이 소파에 앉아서 머릿속으로 할 말을 정리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는지를 물으면 열흘 정도 됐다고 하고, 주완과의 일도 말해야 할까. 그런데 그 일을 다 말해야 하면 정신과를 가는 게 낫지 않나. 아니야. 그렇게 된다면 나를 진짜 미친년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간호사가 마침 내 이름을 불렀고 나를 진료실로 안내했다.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인상이 푸근한 여자 의사가 나에게 살갑게 인사했다. 의사는 봄이 다 지나가고 있는데 그렇게 꽁꽁 싸매면 덥지 않은지 궁금해했다.
나는 등받이가 없는 검정색 의자에 앉은 뒤 벙거지 모자와 마스크, 아이보리색 양털 플리스를 벗었다. 그리고 의사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변했나요. 이게 이구아나인가요 악어인가요 같은 질문은 없었다. 의사는 그저 나를 평범한 환자처럼. 본격적으로 진료를 받기 위해 웃옷을 벗은 일반적인 사람으로 대하며 어디가 아픈지를 물었다. 엄마도 주완이도 내 지금 모습을 알아보지 못했는데. 의사라고 해도 알아보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한숨을 깊게 내쉬다가 결심을 하고 말했다.
“제가 이구아나가 되어버린 것 같아요.”
의사는 풍선이 바람 빠질 때 나는 소리로 픽 웃더니 어디 사는 이구아나인데요? 하고 물었다. 갈라파고스요. 내가 다시 진지하게 대답을 하자 의사는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컴퓨터 화면만 보았다. 남들이 본다면 미친 환자와 정상적인 의사의 숨 막히는 대치 상황이었다.
“환자분 지금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서른다섯입니다.”
의사는 내게 많이 피로한 것 같으니 1시간 정도 수액을 맞고 가라는 말을 했다. 처음 진료실에 들어왔을 때 보았던 인상 좋은 여자는 사라지고 동사무소 출근길에 많이 보는 무표정한 현대인의 얼굴로. 나는 주섬주섬 다시 벙거지 모자와 마스크를 끼고 포근한 양털 후리스를 입었다. 진료실에서 나온 후 데스크 앞에 서서 진료비 수납을 기다리고 있는데 간호사는 나에게 웃으며 수납 안 하셔도 돼요 라고 말했다. 의사가 간호사한테 나에 대해서 뭐라고 말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정신병원은 나가서 500m만 걸으시면 있습니다 같은 말은 안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집으로 가는 길에 꺼진 핸드폰의 까만 화면 너머로 나를 바라보았다. 얼굴을 가린 마스크 뒤에 회갈색의 오돌토돌한 가죽이 보였다. 작게 너 누구야, 하고 나만 들리도록 말을 하자 카악! 하는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목소리도 바뀌어 버린 것이다.
갈라파고스 이구아나가 되어버리고 나서 외할머니 생각이 자주 났다. 죽은 외할머니가 아직 살아있었다면 무언가 조언을 구할 수 있었을까. 이십여 년 전에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을 때. 엄마가 나를 한동안 외할머니 집에 맡겨두었던 시절. 보일러가 뜨끈하게 달아오른 노란 장판에 함께 누워서 외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가 계속 떠올랐다. 외할머니가 여섯 살 적 일어난 한국 전쟁에서 그녀도 나처럼 동물이 되어버린 적이 있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폭격으로 순식간에 아버지와 두 살 난 막냇동생을 잃고 어머니, 언니, 오빠, 그리고 외할머니 이렇게 넷이 피난길에 올랐다. 가족들은 폭격이 잠잠해질 동안 산 깊숙한 곳에서 움막을 치고 지내다가 이동하고, 잠시 쉬고를 반복했다. 그런데 외할머니는 밤에 잠을 자는 내내 너무 무서웠다고 한다. 어머니랑 언니, 오빠가 자신을 버리고 가버릴 것 같아서. 어려서 발도 느리고 무거운 짐도 많이 못 들었기에 오히려 존재 자체가 짐이 된다는 사실을 고작 여섯 살이었던 어린 나이에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 날 누가 업어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가 뒤늦게 눈을 비비며 일어났고 외할머니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외할머니가 자는 사이 다른 가족들이 짐을 빠르게 챙겨서 떠났기 때문이다.
외할머니는 그때 한참 동안 어머니를 부르다가 목이 쉬어버려서 지금 이렇게 여자인데도 목소리가 걸걸해진 거라고 말했다. 그날 어머니는 결국 외할머니가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화가 난 건지 슬픈 건지 분간이 안 가는 얼굴로 다시 찾아와서는 외할머니를 안고 허겁지겁 달렸다. 그때 외할머니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나를 버렸던 거구나. 버리고 돌아온 사람은 이렇게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구나. 외할머니는 바로 그때 고슴도치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온몸에 소름이 바짝 돋고. 버려졌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돌아와 준 것에 대한 안도감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외할머니는 그렇게 내내 고슴도치가 되어 경계를 풀지 않았다고 했다. 매일매일 가시를 세운 상태로 지내서 나이가 들고나니 허리가 너무 아프다고도 했다. 외할머니한테 고슴도치가 되고 나서 슬프지 않았는지를 물었다. 외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가시를 세워야만 하는 상황이 올 때는 슬펐지.”
그 상황은 외할머니의 인생에서 몇 번이나 찾아왔을까.
외할머니가 나에게 자주 해주었던 말이 있다.
“자식을 버린 느이 아버지는 인간도 아니다. 느이 엄마는 지금 너를 잠시동안 나한테 맡겨둔 거지 버린 것은 아니다.”
주문처럼 그 말을 되뇌는 외할머니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도 알고 있어요.
외할머니가 변했다는 고슴도치는 귀엽기라도 하지만 나는 이구아나. 갈라파고스 이구아나. 주완과 주말에 함께 보았던 다큐멘터리에서 슬쩍 보고 와 쟤 진짜 못생겼다고 했는데 내가 그게 될 줄은 몰랐다. 고슴도치는 귀엽기라도 한데. 나는 점점 길게 튀어나오는 입매에 어딘가 멍청해 보이는 눈동자를 가지고 카악! 거리기만 한다. 회갈색의 거친 가죽은 어떤 로션을 발라도 매끈해지지 않고 손은 점점 짧고 투박하게 변하고 있다.
<발병 원인>
일주일 전 주완은 먼저 자신이 집에서 나가겠다고 말했다. 나는 거절하지 않고 그렇게 하라고 했다. 동사무소 일도 그만두게 되었고 앞으로의 돈벌이도 딱히 생각해 둔 게 없었기 때문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주완의 짐을 뺀 24평의 아파트는 혼자 살기에는 너무 넓게 느껴졌다. 안방에 있는 퀸사이즈 침대는 아무리 이리저리 뒹굴어도 떨어질 일이 없었다. 식기구들은 혼자 사는 집치고 너무 많은 것 같았다. 안방 화장실이 있기에 거실에 있는 화장실은 그동안 한 번도 쓰지 않았다. 넓은 소파는 드러눕기에는 좋았지만 누군가가 있었다면 무릎을 베고 누웠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나치게 큰 냉장고, 냉동실에 잠들어 있는 언제 샀는지도 모르는 대량의 냉동식품들, 아직 익숙한 향이 배어 있는 옷방, 나는 관심 없었던 베란다의 여러 가지 화분들. 주완은 어떻게 이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떠날 수가 있었던 건지 궁금해졌다.
집으로 돌아와 핸드폰을 확인하니 엄마의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엄마는 내가 동사무소 행정 일을 그만두고 나서 일주일에 한 번씩 전화해서 앞으로의 벌이에 대한 걱정을 늘어놓았다. 앞으로 아이도 가져야 하는데 박 서방 혼자 벌어서 먹고살 수는 있는지. 앞으로 계속 일을 안 할 것인지에 대한 말들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하루 한 번씩 나에게 전화를 해서 도대체 주완과 이혼을 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런 게 있다고 말했다. 엄마는 박 서방은 자기 잘못이라던데 그놈 바람 피웠니? 하고 심각한 목소리로 화를 냈다.
나는 엄마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내가 캭(여보세요)을 말하자 엄마가 어 밥은 먹었고. 하고 물었다. 내가 캬. 캬악. 카악 같은 소리를 내는 동안 엄마는 이제 나는 된장찌개 해서 먹으려고. 갑자기 혼자 사는데 안 외롭냐. 등의 평범한 대답을 해주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엄마는 주완의 이야기를 했다.
“너 혹시 박 서방이 일 관두고 배우 하고 싶다고 해서 그랬어?”
나는 카악(아니야)이라고 대답을 한 후 엄마의 전화를 끊었다.
내가 주완과의 이혼을 결심하기 직전에 우리는 근 한 달간 같은 주제로 싸우고 있었다. 우리는 거실 식탁을 마주 보고 앉아서 기나긴 전투를 했다. 각자의 창으로 서로의 마음을 잔인하게 할퀴었다. 나는 주완의 뒤늦은 꿈을 같잖게 비웃었고 주완은 매번 부정적이고 폭력적인 말만 내뱉는, 감정 없는 나를 증오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나에 대한 악성 민원이 꾸준히 들어오는 것이라며.
주완과 나는 대학교에서 만나 함께 행정고시를 준비했다. 나는 두 번, 주완은 네 번을 떨어진 후 우리는 9급 공무원이 되었다. 결혼하고 나서는 쭉 맞벌이를 유지했지만 주완은 아이를 가지고 싶어 했다. 나는 이십 대 초반부터 후반 내내 나의 오랜 목표였던 일을 그만두었다. 물론 민원인들이 작성한 나에 대한 싸가지 없다는 글들도 내가 일을 그만두게 된 사정에 한몫했다. 가장 높은 조회수를 기록했던 글은 배우자의 사망신고를 하러 온 사람에게 감정 없는 로봇처럼 응대한 내 모습을 비난하는 게시글이었다. 그렇게 중요하고, 혼돈이 가득하고, 틈 없이 빠듯해진 시기에 주완은 정말 생뚱맞은 이야기를 한 것이다.
그날 우리 둘 앞에 놓여있었던 가득 채워진 물컵은 어느새 모두 동나있었다. 우리의 대화는 끝이 없이 이어졌지만 한 방향을 바라보며 가는 것이 아닌 여러 가지의 구불구불한 모습으로 이어졌다. 답이 없었다는 뜻이다. 일을 그만두고 오디션을 보러 다니고 싶다는 주완의 의지가 도저히 꺾일 기운이 보이지 않자 나는 홧김에 물컵으로 내 머리를 내리쳤다. 머그잔이 깨지고 조금 남아있었던 물로 인해 내 머리가 젖었다. 그 순간에 주완은 집을 나가버렸다. 방바닥 가득 깨진 머그잔 조각과 나를 남겨두고. 이마 위로 검붉은 피가 눈물처럼 투박하게 툭 흘렀다.
나는 그날 홀로 구급차를 불러 응급실에 갔다 왔고. 이마 여섯 바늘을 꿰맨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주완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고 깨진 머그잔 조각이 여전히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다는 것도 알았다. 나는 늦은 밤이었지만 청소기를 켜서 조각들을 모두 치웠다. 이 모든 과정은 정확히 4시간이 걸렸다. 내가 주완과 이혼을 하기로 결심한 시간이었다.
주완은 새벽에 천천히 도어록을 치며 집으로 돌아왔다. 고양이처럼 소리 없는 발걸음으로 이리저리 집안을 돌아다니더니 내가 누워 있는 침대로 살며시 들어왔다. 그리고는 내 허리를 조용히 감쌌다. 주완은 미안하다며 벽을 보고 돌아누운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주완의 축축하고 따뜻한 눈물이 느껴졌다. 아마 주완도 그때 어렴풋이 느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헤어질 것을. 주완의 성격이라면 나에게 그런 말을 내뱉고 다친 나를 혼자 두고 떠났던 일에 뒤늦은 죄책감을 가질 것이었다. 이런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길 일은 절대로 없었다.
내가 이구아나가 되어버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주완이 다시 집으로 돌아온 순간. 나는 외할머니처럼 주완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알 수 있었다. 나는 주완과 얼굴을 마주해도 무슨 표정인지 몰랐을 것이다.
나는 거울을 찾지 않아도 마음속으로 느꼈다.
아, 나 지금. 갈라파고스 이구아나가 된 것 같은데.
<이해와 동화>
텔레비전을 켜서 갈라파고스 이구아나 편 다큐멘터리를 틀었다. 내가 도대체 그리고 정확히 어떤 종이 된 건지 알아야 했다. 차분한 목소리의 남자 성우는 찰스 다윈이 가장 끔찍하고 역겨운 동물로 갈라파고스 이구아나를 지칭했다고 설명했다. 나는 그 말에 거울을 들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정도는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정확한 명칭은 갈라파고스 이구아나가 아니라 바다 이구아나이다. 따뜻한 모래와 암벽 위에서 일광욕을 즐긴 후 유유히 바다로 들어가 버리는 모습이 왠지 귀여웠다. 고향 사람들을 본 것처럼 그리운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다행인 걸까. 바다에 있는 수많은 해초를 먹으며 사는데 음식을 섭취하기 위해서는 네 발을 납작 엎드려서 거의 기는 모습으로 뜯어먹어야 한다. 처음이 모습을 우연히 주완과 함께 봤을 때는 뭐 저런 모습으로 밥을 먹냐 하고 비웃었다.
이것은 바다에서 헤엄을 칠 때 긴 꼬리를 S자로 움직여 매끄럽게 움직인다. 마치 뱀 같기도 인어 같기도 태초의 고대 생물 같기도 한 모습이다. 인간이 오리발을 끼고 수영을 할 때 팔을 허리에 딱 붙이고 다리는 곧게 뻗어서 물장구를 치는 것처럼. 갈라파고스 이구아나도 네 다리를 모두 한곳으로 바라보도록 한 후 꼬리의 힘으로 헤엄을 친다. 슬며시 꼬리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바다에서 숨을 쉴 수 있는 60분의 시간이 모두 지나면 다시 육지로 올라와 햇빛을 따라다닌다. 바다에서 완전한 숨을 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육지와 오고 가는 행동을 반복해야만 하는데 바다 이구아나라는 명칭이 붙었다.
바다에서 헤엄을 치는 동안 염분이 체내로 들어오게 된다고 한다. 염분을 배출하기 위해서 콧물 재채기를 하고 염분이 포함된 그 콧물은 다른 이구아나 머리에 발사가 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갈라파고스 이구아나의 머리에는 소금 결정들로 인해 하얗고 두꺼운 막이 생겼다. 나는 휴지로 콧물을 풀어보았다. 손으로 콧물을 살짝 찍어 혀에 갖다 댔는데 짠맛이 나지는 않았다. 바다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갑자기 궁금해졌다. 갈라파고스 이구아나가 바다에서 헤엄을 치는 유일한 이구아나이기 때문에 바다 이구아나라면 내가 바다에 들어가게 됐을 때 나는 어떻게 될까. 나는 그 순간 완전히 갈라파고스 이구아나가 되어버리는 것일까. 그렇게 된다면 나는 죽을 때까지 이구아나의 모습으로 인간들 속에서 살아갈까. 아니면 에콰도르행 비행기 티켓을 끊고 갈라파고스 제도로 가서 살아가게 될까.
갈라파고스에서 헤엄을 치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나와 구분할 수도 없이 똑 닮은 녀석들과 함께 늙어가는 것이다. 휘몰아치는 파도를 거친 피부로 견디고 등부터 꼬리까지 쭉 이어진 가시를 햇빛 아래에 늘어뜨려서 물기를 말린다. 체온이 올라가서 몸이 뜨끈해지면 배를 채우기 위해 다시 저벅저벅 바다로 향하는 넓적한 네 다리. 너도 같이 밥 먹으러 갈래? 하고 카악! 하고 울면 다른 바다 이구아나는 카악(아니, 나는 아직 배 안 고파)! 나는 미련 없이 바다로 들어간 후 긴 꼬리를 흐느적거리면서 S자를 그리며 자유롭게 헤엄을 친다. 푸르고도 투명한 바닷물 아래 가득 깔린 초록의 해초를 발견하고. 몸을 굽혀서 기어다니며 해초를 마구 뜯어 먹는다. 맛있다. 따뜻하다. 기분 좋다. 평화롭다. 등의 표현들만 가득한 삶을 살 것이다.
가끔 나의 태초를 상상해 보기도 하겠지. 나는 오래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직까지 공룡이 살아있었다면 나와 같은 모습이진 않았을까. 여기에는 엄마와 나를 떠난 아빠도 없고. 주완이도 없고. 나 홀로 남겨진 외할머니의 노란 장판 깔린 방도 없고. 혼자 지내기에는 넓은 아파트도 없고. 하는 실없는 상상을 할 때 갑자기 거대한 파도에 휩쓸린다. 파도는 수면 위에서만 난폭한 것 같지만 수면 아래에 있는 우리에게는 육지의 태풍과 비슷하다. 중심을 잃고 꼬리의 여유로움도 잃은 채 허우적거리면서 살려달라고 해보았다. 지나가는 낚시꾼들의 배를 발견하고 살려달라고 크게 소리쳤다.
“카악! 캭!”
낚시꾼들은 그저 내가 시끄럽게 운다고 생각했다. 나는 육지 쪽을 바라보며 나의 친구들에게 구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멍청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거나 두 눈을 감은 채로 나른하게 일광욕을 즐길 뿐이었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꿈에서 깼다. 내가 상상을 한 줄 알았더니 잠에 들어서 상상이 꿈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다 갑자기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외할머니는 죽기 전까지 고슴도치였을까. 인간이었을까. 고슴도치였다면 가시를 세우고 죽었을까. 눕히고 죽었을까.
봄이 끝나가는 시점은 이미 여름이 봄을 이긴 지 오래다. 아직은 선풍기만으로 버틸 만했지만 햇볕이 가득 드는 거실 소파에 한참 동안 잠들고 일어나보면 목에는 땀이 조금씩 맺혀 있게 되었다. 나는 샤워를 하기 위해 옷을 벗고 안방 화장실에 들어갔다. 하얀 속살을 전부 드러낸 내 몸. 이 아니라 나는 두 발로 선 갈라파고스 이구아나였다. 등 뒤에는 아침까지 분명히 없었던 뾰족한 가시까지 있었고 짧았던 꼬리는 길어져 화장실 안을 휘적거리며 마음대로 흔들렸다. 다큐멘터리 속 갈라파고스 이구아나들과 거의 똑같아졌다.
<치료>
나는 그동안 내가 몰랐던 주완의 이야기를 우리의 대학교 선배에게 처음 듣게 되었다. 선배는 사실 주완이 과거에 독립 영화의 조연으로 출연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주완의 아는 동생이 감독으로 연출한 아마추어 영화인데 역할을 할 사람이 부족했기 때문에 주완이 부탁을 받았다고. 선배는 주완이 갑자기 연기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닐 것이라 말했다. 그때 주완이 우연한 기회로 연기를 잠깐 해보았기 때문일 거라고. 그 말은 나에게 네가 주완을 조금 더 이해해 줬다면 이라는 설득으로 들려왔다. 나는 선배에게 그런데 이 이야기를 저한테 왜 하시는 거예요. 오지랖이에요. 관심 없어요. 같은 대답 대신 다른 말을 했다. 선배 그 영화 제목이 뭐예요.
영화의 제목은 ‘낯선 사람’이었다. 나는 영화를 틀면서 주완과 결혼을 한 후 함께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본 적이 있었던가를 떠올려 보았다. 우리에게 그런 추억은 없었다.
주완은 여자 주인공의 남자친구 역할이었는데 이 연기를 한 기억이 오래 남아서 지금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꾼 것 치고는 잘 못했다. 여자 주인공과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장면에서는 눈이 아닌 입 쪽을 보는 듯한 시선이었고 가끔 혀를 씹은 건지 잘 들리지 않는 대사도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앳된 얼굴의 주완이가 발 연기를 하는 모습. 영화의 스토리는 여자 주인공이 교통사고를 당하고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시시한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하나 특이한 점은 자기 자신 외의 모든 사람과 추억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여자 주인공은 자아에 대한 기억을 잃었고 남자친구인 주완에게 왜 이 모습을 좋아하는 거야. 이건 내가 아니야. 같은 말을 한다. 주완은 충격을 받은 얼굴로 병실을 나가야 하지만 카메라에 담긴 주완의 얼굴은 어정쩡하다. 그런 주완을 보고 나도 모르게 웃으며 등신. 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주완은 초반에만 등장하고 영화의 후반부터는 아예 등장하지 않았다. 주완의 후배인 감독이 더는 안 되겠다며 주완이 맡은 남자친구라는 인물의 존재감을 없애버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 주인공은 진짜 자신을 찾아보고 싶다며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바다에 간다. 나는 그 장면에서 조금 실망을 하긴 했다. 왜 항상 바다일까. 왜 모든 이야기 속 고립된 인물들은 결국은 바다에 가는 것일까. 나는 영화를 멈추고 생각해 보았다. 사람들이 갑자기 혼자 바다에 가는 이유를.
바다가 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산에 가고 싶은 생각이 자주 들지는 않지만 바다를 생각하면 무작정 깊은 물 속으로 뛰어들고 싶다. 우리는 사실 모두 바다에서 시작된 생명체일까. 그래서 자꾸만 바쁘게 살아가는 육지에서 바다를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는 것일까. 갈라파고스 이구아나는 육지에서 햇빛을 보지만 하나둘 바다로 들어가 헤엄을 친다. 그곳에만 그것들의 먹이가 있기 때문이다. 갈라파고스 이구아나가 세상에 살아가기 위해서는 바다 안의 해초들이 필요하다. 바다가 필요하다. 그래서 뛰어든다. 인간이 바다에 뛰어드는 이유도 비슷하지 않을까. 바다에 우리가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를 알 수 있기 때문일지도. 다양한 생명체를 가득 품어낸 바다에서 태초의 모습을 그리워하기 때문일지도. 나는 어쩌면 나도 식상한 행동을 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나도 결국은 바다에 가야만 한다.
자동차를 운전하여 집에서 가까운 바다로 향했다. 내가 놀란 것은 갈라파고스 이구아나가 된 지금 이 몸으로도 운전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액셀과 브레이크를 밟을 수 있고 핸들을 자유롭게 돌릴 수 있었다. 백미러를 통해 본 내 모습이 내 스스로도 어이가 없긴 했다. 사실 갈라파고스 제도의 바다를 가는 것이 가장 완벽하겠지만. 당장 에콰도르행 비행기 티켓을 끊을 수가 없었기에 국내의 바다로 목적지를 정했다. 바다는 모두 이어져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내가 고른 바다에는 조건이 있다. 가까운가. 인적이 드문가.
자동차로 1시간 정도를 달려 도착한 바다에는 정말 아무도 없었다. 나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갈라파고스 이구아나의 발에 양말과 신발을 신기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집에서 나올 때부터 맨발로 차를 운전해서 왔다. 나는 거칠고 짧은 두 다리로 모래 위를 천천히 걸었다. 작은 공룡의 발바닥 자국이 찍힐 줄 알았지만 230mm 정도의 인간 발바닥 자국이 눈에 보였다. 바람이 많이 불지 않아 파도는 잔잔했다. 해안가이기 때문인지 내가 살고 있는 지역보다는 공기가 조금 쌀쌀하게 느껴졌다. 이곳은 아직 여름이 찾아오지 않은 봄의 기운이 가득 느껴졌다.
나는 푸른 바다로 한 걸음씩 다가갔다. 하얀 거품을 일으키는 파도가 얇게 모래사장 위로 올라왔고 내 발등을 간지럽혔다. 바닷물이 아직 차가웠다. 다리를 앞으로 움직일 때마다 물의 저항 때문에 뒤로 조금씩 밀려났다. 열심히 바닷속으로 가려고 해도 나를 자꾸만 밀어내는 파도로 많이 움직이지 못했다. 이미 옷의 절반이 젖었고 나는 내 두 손을 바라보았다. 아직 나는 갈라파고스 이구아나였다. 더 깊은 곳으로 가기 위해 보폭을 크게 해서 걸어가고 있는데 바다 뒤 모래사장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를 말하는 듯한 남자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려고 할 때 꿈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파도가 나를 순식간에 덮쳐왔다. 나는 파도에 휩쓸려 강제로 몸 전체가 바닷속으로 들어갔고 수면 아래 바다는 파도가 지나간 자리여도 여전히 어수선한 게 피부로 느껴졌다.
염분이 가득한 바닷물에서 눈을 뜨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분명 내 몸에 붙어 있었던 긴 꼬리는 갈라파고스 이구아나처럼 자유롭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몸이 딱딱하게 굳은 채 발장구를 열심히 쳐보았다. 그때 누군가가 나를 거세게 붙잡았다. 그리고 파도가 잔잔한 곳으로 나를 이끌었다.
“아가씨 괜찮아요!”
아까 전 뒤쪽에서 나에게 목소리를 내던 남자와 같은 사람이었다. 나는 모래가 묻은 지저분한 얼굴에 초점 없이 흐린 눈동자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50대 정도의 아저씨였다. 남자는 딸을 혼내는 것처럼 나에게 화를 냈다. 어쩌자고 아무도 없는 바다에 그렇게 덥석 들어가냐고. 아직 물이 따뜻해지지도 않았는데. 남자는 자살을 할 것이었냐고 묻고 싶었는지 잣!까지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배 위에 모은 채 다소곳한 포즈로 누운 나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남자는 처음에는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다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구급차 안 불러도 되겠어요?”
남자는 티셔츠의 물기를 두 손으로 쭉 짜내고 머리를 털며 나에게 물었다.
“냅두세요. 햇빛 좀 맞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나는 하늘을 보며 허공에 대고 말했다.
남자는 나를 미친년이라고 속으로 단정 지은 것 같았다. 남자는 한숨을 깊게 내쉰 후 해변 밖으로 걸어갔다. 자동차의 시동이 켜지는 소리와 점점 모래사장 근처에서 멀어지는 바퀴 소리가 들려왔다.
<잠복기>
아빠가 엄마가 아닌 여자의 남편과 내가 아닌, 곧 태어날 아이의 아빠가 되기 위해 엄마와 나를 떠났던 날. 엄마는 거의 기절하기 직전까지 나를 껴안고 울었다. 체구가 작은 초등학생이었던 나를 강하게 껴안은 채로 엄마는 내 노란 내복에 눈물을 가득 묻혔다. 나는 거실 한 켠에 쌓인 빈 소주병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엄마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엄마가 일을 하러 밤늦게까지 나가야만 했기에 나는 한동안 외할머니 집에서 지내야만 했다. 오래된 기와집 앞에 도착해서 양손에 내 옷과 물건을 가득 들고 외할머니 앞에 선 날. 외할머니는 엄마처럼 나를 꼬옥 껴안은 채로 불쌍한 것이라며 나를 토닥여 주었다. 외할머니한테서는 쿰쿰한 된장 냄새가 났다.
외할머니가 죽었던 5년 전 여름에 엄마는 또다시 생수병 한 통을 다 채우고도 남을 눈물을 흘렸다. 당시에 나는 주완과 꽤 오랫동안 연애를 하며 서로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엄마는 머리카락에 꽂은 하얀 리본을 만지작거리며 외할머니의 사진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 손을 잡고 물었다.
“너는 왜 울지 않는 거니.”
이혼을 하고 주완이 짐을 찾으러 집에 왔던 날. 사실 옷방에서 옷을 챙기던 주완이가 눈물을 닦는 것을 본 적 있다. 나는 모르는 척 거실에 앉아 이미 갈라파고스 이구아나로 변하여 거칠어진 피부를 의미 없이 매만졌다. 짐을 거의 다 챙긴 주완은 현관문에서 잘 가라고 배웅하는 내게 말했다.
“너는 정말 잘 안 우네.”
그게 주완과 나의 마지막이었다.
모래 위를 얕게 지나가는 바닷물이 발끝을 간지럽혔다. 나는 결국 갈라파고스 제도로 갈 수 없는 갈라파고스 이구아나인 것 같다. 분명히 몸은 갈라파고스 이구아나인데 자유롭게 수영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바다가 나를 거부한다는 뜻이 아닐까. 인간으로 계속해서 살아가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인간인 채 살아갈 생각을 하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쩐지 서글펐다. 그래서 눈물 한 방울을 빠르게 흘려보냈다. 엄마도, 주완이도, 죽은 할머니도, 그리고 현관문 앞에서 나에게 잘 지내라고 말한 후 미련 없이 떠난 아빠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나의 눈물. 심지어 나조차도 오랜만인 나의 눈물이었다.
아내의 사망신고를 하러 동사무소에 왔던 남자가 생각났다. 나와 얼굴을 마주 보고 있던 남자는 아무런 감정도 담아내지 않은, 아니 그러지 못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순식간에 밀려오는 파도처럼 남자는 넘쳐흐른 슬픔을 보여주었다. 부서 안 모든 직원과 대기하는 민원인들이 남자를 쳐다보아도 남자는 계속 울었다. 처음에는 평범한 성인 남자가 우는 것처럼 소리 없이 눈가에 번진 눈물을 보이다가 점점 어린 아이가 우는 모습으로. 나는 그런 남자 앞에서 어떤 표정이었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그걸 특별히 기억하지 않은 사람이기에 갈라파고스 이구아나가 되어버린 것일까.
왜인지 그 남자는 살아가면서 절대로 갈라파고스 이구아나가 될 일도, 고슴도치가 될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그럴 수 있을까. 그렇게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