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겨울바람과 함께 부는 흙먼지에 눈이 따가웠다. 폭설 예고로 움직임을 멈춘 재개발 현장은 고요했다. 형태가 남아 있지 않은 건물의 잔해가 발에 걸렸다. 무너지지 않은 것들은 땅을 딛고 서 있었다. 빨간 페인트로 엑스 표시가 크게 쳐진 낡은 주택의 외벽을 짚었다. 벽에 간 금을 따라 쓸고, 손톱으로 긁어 보기도 했다. 손톱이 울퉁불퉁하게 깨지고 나서야 손을 보았다. 빨간색의 어떤 것도 묻지 않은 손은 거뭇하기만 했다. 먹구름이 잔뜩 껴 시린 겨울 하늘, 눈처럼 휘날리는 먼지, 애매하게 거무스름한 한쪽 손. 주변이 온통 잿빛이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엄마에게서 온 문자였다. 어디야? 할머니 많이 화나셨어. 네 오빠가 걱정되지도 않아?
얼굴 봤으면 됐잖아. 많이 다치지도 않았던데|
얼굴 보니까 괜찮아 보이|
오빠가 사고 난 게 내 잘못이야?|
나는 괜찮은지 안 궁금해? 할머니한테 맞았|
어차피 안 죽었|
여러 문장을 만들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답장은 나중에 하자 싶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돌아가자. 때마침 ‘그 애’의 기일이라 도망치듯이 찾아온 옛 동네는 내가 서 있을 곳이 되지 못했다. 걸음을 빨리해 골목 모퉁이 하나를 돌자 두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공사 관계자인가 싶어 다급하게 몸을 숨겼다. 안전띠를 넘고 몰래 들어와 걸리면 일이 귀찮아질 게 분명했다. 공사 관계자의 회색 재킷을 입은 남자와 빨간 모자를 눌러 쓴 여자가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관계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아이참, 젊은 아가씨가 알 거 다 알면서 왜 이래. 여자가 관계자의 팔을 붙잡았다. 아저씨, 진짜 딱 십 분이면 돼요. 글쎄,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안 된다니까. 여자는 간절했다.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란 친구 기일이라 그래요, 제발요……. 먼지를 다 털어내지 못한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안 돼, 돌아가. 이유 있다고 들여보내면 출입 금지 구역이 왜 있겠어. 관계자가 여자의 등을 밀었다. 아, 아저씨이. 말끝을 늘리며 애원하던 여자는 관계자를 보려 고개를 돌렸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어깨가 흠칫거렸다. 여자는 밀려나면서 나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대신 계속해서 나를 응시했다. 빨간 모자의 챙 아래로 가려진 눈동자가 나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을 것 같았다. 여자는 내가 재개발 구역에서 빠져나올 때까지 그 앞에서 쪼그려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관계자의 눈을 피해 조심스럽게 출입 금지 안전띠를 넘자 여자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목에 걸린 카메라가 흔들렸다. 온통 무채색인 세상 사이에서 홀로 붉은 한 사람.
“안녕하세요.”
모자 그림자에 가려진 얼굴이 희미했다. 먼지가 묻은 손으로 두 눈을 문질렀다. 따가워서 아주 조금 눈물이 났다.
여자는 자신을 홍이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이름이 정말로 홍인지는 모르겠다. 진짜 이름을 묻긴 싫어서 나 역시 이름을 말하는 대신 ‘진’이라고 소개했다. 누가 봐도 이름에서 따온 가명이었지만 홍은 상관없어하는 눈치였다. 그녀는 대화를 이어 나가는 대신에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 내가 비흡연자일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은 듯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물론 비흡연자일 리가 없었다. 멋쩍은 척 담배를 받아 입에 물었다. 홍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찰칵거렸다. 작은 불이 일렁이자 그녀는 라이터를 내 쪽으로 가까이했다. 나는 고개를 숙여 불을 붙였다. 훅, 하고 바람이 불었다. 코앞까지 온 빨간 모자에 반사적으로 숨을 참았다. 모자의 챙이 코끝을 스쳤다가 뒤로 빠졌다. 홍이 깊게 들이마신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모자 아래로 겨우 보이던 얼굴이 연기에 가려졌다. 홍은 손을 휘저어 연기를 흩트렸다. 빨간 모자가 선명해지고 나서야 나는 숨을 쉬었다. 내가 한 모금도 빨아들이지 않자 홍이 물고 있던 담배를 뺐다.
“혹시 담배 안 피우나요?”
“아뇨, 그건 아니에요.”
그냥 그 애랑 참 많이 닮았다 싶어서. 이목을 끄는 분위기라던가, 다짜고짜 성큼 다가오는 행동이라던가, 흩날리는 긴 생머리가. 말을 삼켜 텁텁한 입 안이 담배 연기로 가득 찼다. 내가 절반도 태우지 않은 꽁초를 버릴 때까지 기다리던 홍은 이윽고 재개발 구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들어간 거라 알려줄 것도 없었다. 왜 들어가려고 하는 거냐고 묻자, 홍은 관계자에게 말한 것과 똑같이 답했다.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란 친구 기일이라 그래요.”
홍은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애가 싫어한 동네의 끝이 어떤지 보여주고 싶었어요. 꼴좋잖아요. 결국 재개발돼서 사라지는 결말이라니.”
“그 애랑은 어떻게 만났는데요?”
“보통은 그 애가 누구인지 먼저 묻지 않나요?”
재가 툭 떨어졌다. 타다 남은 꽁초를 바닥에 떨어트려 발로 짓밟았다.
“이 동네에서 오늘이 기일인 ‘애’는 한 명뿐이니까요.”
“‘애’가 아닐 수도 있잖아요.”
참 이상한 가능성을 제시하는 사람이구나, 했다. 내가 대꾸하지 못하자 홍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었다.
“농담이에요. 맞아요, 그 애. 열아홉 살에 죽은 여자애.”
저절로 구겨지려는 미간을 억지로 폈다. 벌써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의 사이는 아니었다. 거리감이 좀처럼 가늠되지 않았다. 피어오른 입김이 홍과 나 사이에 자리 잡았다. 그날도 이렇게 입김에 가려져 그 애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있었음에도. 결국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그 애의 모습은 하염없이 흐릿했다. 홍의 목소리 대신 그 애의 마지막 말이 들려왔다.
내가 사람을 죽였어.
바람이 세차게 부는 겨울밤, 그 애는 피 한 방울,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멀끔한 교복 차림으로 한밤중에 집 앞에 나타나 그렇게 말했다. 어떡할까, 현진아. 내 팔뚝을 붙잡은 손이 바들거렸다. 손목에 있는 빨간 고무줄이 흔들렸다. 슬리퍼 밖으로 훤히 드러난 발가락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갑작스레 몰아치는 찬바람에 입이 얼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자꾸만 눈물이 떨어져 간지러운 발가락만 꼼지락거렸다. 그 애는 고개를 들어 긴 생머리에 가려져 있던 얼굴을 보여주었다. 우는 건 내가 아니라 그 애인데도 시야가 흐릿해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 애가 다시 말했다.
내가 죽이는 거야…….
*
그 애는 학교에서 ‘야’라고 불렸다. 상대를 부르는 감탄사가 아니었다. 정말 이름이 ‘야’였다. 백 야. 고등학교 입학 날, 그 애가 학급에서 자신의 이름을 소개할 때 곳곳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엔 나도 포함이었다. 어떻게 이름이 야일 수가 있을까. 나보다 더 대충 지은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그 애는 이런 상황에도 아무렇지 않게 소개를 이어갔다. 흰 백에 밤 야를 써서 백 야, 입니다. 선생님은 멋진 이름이라며 손뼉을 쳤다. 당시 문학 담당이던 담임 선생님은 그 길로 백야 현상에 관해 설명했다. 해가 지지 않는 밤, 하얀 밤, 한밤의 태양. 나와 비슷한 처지의 이름인 줄 알았더니 그 반대였다. 낭만이 있는 사람이라면 좋아했을 법한 이름이지만, 나는 어렸을 적부터 낭만과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감상과 이상을 지우니 질투만 남게 되는 거다. 누구는 뜻 하나 담지 않고 그저 무당에게서 액받이 용으로 받아온 한자를 이름이라고 쓰는데……. 그 애는 아이들의 입에서 자주 오르락내리락하는 이름을 가진 만큼 많이 불렸다. 아마 학기 초에 처음으로 외운 이름을 말하라 하면 모두 그 애를 가리킬 것이다. 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 애의 이름을 직접 혀 위에 올려 굴리기까지 한참 걸렸다. 다른 친구들은 ‘야’라고 부르면서 그 애는 꼭 ‘반장’이라고 불렀다. 내가 그 애의 이름을 입에 담은 건 여름 방학이 끝난 직후였다. 체육 선생은 여학생들이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수업에 참여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었고, 하필이면 그날 머리 끈을 두고 온 내게 그 애는 묶고 있던 머리를 풀어 고무줄을 빌려주었다. 그러고는 자신은 손목에 있던 빨간색 머리 끈으로 머리를 새로 묶었다. 체육 시간이 끝나고 고무줄을 돌려줄 때 습관적으로 그 애를 반장이라고 불렀다. 빨간 머리 끈을 다시 손목에 끼운 그 애가 고무줄을 받으며 말했다.
나 이제 반장 아닌데.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눈만 굴렸다. 이름으로 불러줄 때 되지 않았나. 그 애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어차피 불러봤자 그것이 이름인지, 아니면 호칭인지 구분할 수 있는 건 부른 당사자뿐인 이름인데도 왜 저렇게 이름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살짝 접은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꼬웠다. 내가 말이 없자 그 애는 고무줄을 만지작거렸다. 손목에 걸린 빨간 머리 끈이 유독 짙었다.
그러면 밤이라고 불러도 돼? 야라고 부르면 너무 헷갈려서.
그렇게 그 애를 부르는 이름이 새로 생겼다. 이름을 부르고 싶지 않아서 대충 지어낸 건데도 밤은 유독 맘에 들어 했다. 내가 밤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다른 애들이 따라 하려고 하면 밤은 단호하게 안 된다고 했다. 내가 직접 지어준, 오직 나만이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그 사실만으로 드는 감정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밤이 하고 다니는 머리끈의 높은 채도가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곤 오빠의 액운뿐이라 생각하던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소유한 이름이라고. 여태까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 애는 자신을 밤이라고 불러달라고 했어요.”
홍의 말을 듣는 순간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밤이 나를 붙잡고 울며 죽이지도 않은 사람을 죽였다고 말했을 때도, 밤의 장례식에 갔을 때도, 오빠의 교통사고 소식에 할머니가 쓸모없다며 물건을 마구잡이로 던지며 소리를 질렀을 때도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손바닥만 쥐었다, 폈다 하며 홍의 시선을 피했다. 뒤쪽에 있는 재개발 구역의 무너진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레고 조각처럼 지저분하게 땅에 어질러져 있는 잔해들은 전부 흔적도 없이 치워질 것이다. 볼 안쪽 살을 잘근거렸다. 세상은 변한다. 뒤처지는 것들은 사라지고, 무너지는 것들은 잊힌다. 유일하고 온전한 건 없었다. 열여덟의 나는 뒤처졌고, 밤은 열아홉에 무너졌다. 하도 안쪽 볼을 씹어서 피 맛이 느껴질 무렵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군요. 그래서요? 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끄덕임이었다. 홍은 밤과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래서 자신은 그 애에게 홍이라고 소개했고, 서로의 일상을 공유했고, 위로도 해주고, 못 할 말 할 말 다 하고, 또……. 솔직하게 말해서 이후에 신이 난 그녀가 쏟아지듯이 내뱉은 이야기들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이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역시 내가 서 있을 곳이 되지 못했다.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처럼 납골당에만 갈 걸, 왜 쓸데없이 곧 사라질 동네를 찾아서는. 홍이 쓰고 있는 빨간 모자가 거슬렸다. 눈이 부셨다. 밤이 좋아했기에 나 역시 좋아했던 그 색이 문득 미워졌다. 그 애는 고작 랜덤 채팅 앱에서 만난 사람에게 내 것이었던 이름을 알려주었다. 유일함이 사라지자 심사가 뒤틀려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홍이 왜 그러냐고 물었다.
“그냥 웃겨서요.”
나는 그다지 낭만과 거리가 먼 사람이 아니었나 보다. 오히려 그 누구보다 낭만적이라 홀로 남은 뒤에 몰려오는 감정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
밤이 랜덤 채팅 앱에서 사람을 만난 건 이미 알고 있어서 홍을 만났을 때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밤이 죽은 원인이 이 랜덤 채팅이라고 여겼던 적도 있었기에, 설마 이 사람이? 라는 생각이 일순간 들기도 했다. 밤의 랜덤 채팅과 이것이 죽음으로 이어지기까지는 꽤 많은 일들을 거쳐 올라가야 했으나, 본론부터 말하자면 밤은 사랑 때문에 죽었다. 아마 내 앞에 있는 이 사람 때문일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나는 도망칠 곳이 필요했다. 사실은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면서…….
밤은 가끔 핸드폰을 보면서 헤프게 웃었다. 분명 SNS를 열심히 하는 편이 아닐 텐데도 쉬는 시간이든, 하교 시간이든 틈이 나면 디자인 없는 빨간색 케이스를 낀 핸드폰 액정을 빠르게 두드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처음에 내가 아닌 다른 친구들에게는 연락을 자주 하는 편인가 했다. 애들에게 물어보니 그건 아니었다. 야, 남친 생겼나? 어느 날엔 옆자리 친구가 혼잣말처럼 작게 말했다. 고개를 푹 숙여 얼굴을 가린 긴 머리카락 사이로 밤의 붉어진 볼이 보였다. 정말 남자친구가 생겼는지 궁금해져 몰래 뒤로 다가가면 핸드폰 화면이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였다. 이러한 행동이 꽤 오래가자 밤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소문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밤을 좋아하던 내 뒷자리 남자애는 한동안 침울해져 있었다. 남의 우울한 감정은 전염된다는 말이 사실인지, 나도 덩달아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참고 참다가 결국 호기심을 이겨내지 못해서 밤에게 연애하냐고 물었다. 그건 아닌데, 왜? 라고 말하는 밤은 어째서 이런 질문을 듣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나는 밤의 짝사랑을 확신했다. 보통의 짝사랑은 무지에서부터 비롯되니까. 하나의 호기심을 해결하니 이제 또 다른 하나가 궁금해져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궁금증이 머리를 복잡하게 했다. 결국 다른 건 다 건너뛰고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을 내뱉었다. 사귀는 사람 생기면 나한테 소개해줘, 말하고 나서 한 박자 늦게 이유를 덧붙였다. 그냥……, 제대로 된 사람인지 보게. 시답잖고, 급조된 이유였다. 너무 친한 척한 것 같아 눈치를 살폈지만, 밤은 흔쾌히 승낙했다. 기쁜 마음에 한술 더 떠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알려달라고도 했다. 마찬가지로 남의 사랑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어이없는 핑계를 붙여가면서 말이다. 사랑엔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남들은 호르몬에 미쳐서 이리저리 사랑을 외치고 다닐 때 나는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자리를 만드느라 바빴다. 밤은 의미 모를 웃는 얼굴로 또 그러겠다고 했다. 내 말에 더 이상 의문을 품지 않고 쉽게 받아들이는 밤 때문에 우리 둘 사이에 그어져 있는 선이 선명하게 보였다. 문득 속이 쓰린 것 같았는데, 별거 아닌 척 넘겼다.
그저 지나가는 대화이고, 시간이 지나면 잊힐 줄 알았으나 밤은 정말로 약속을 지켰다. 일 학년을 마무리 짓는 종업식 날, 낭만이라도 가지라는 듯 펄펄 내리는 눈 속에서 밤은 채도가 높은 빨간 목도리를 하고 있었다. 밤은 선명한 붉은색을 좋아했고, 그만큼 새하얀 피부와 잘 어울렸다. 밤은 정해진 규칙처럼 빨간색으로 된 자그마한 소지품만 지니고 다녔는데, 유독 그날에만 빨간 목도리를 했다. 밤은 목도리에 얼굴을 묻으며 수줍게 말했다. 나 좋아하는 사람 생긴 것 같아. 나는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누구인지, 몇 살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서 만났는지……. 궁금해해야 마땅한 것들이었는데도 알고 싶지 않았다. 추위에 입이 얼어버린 사람처럼 꾹 다물고 있다가 겨우 하나를 물었다. …좋아? 머리카락 사이로 붉어진 귀가 보였다. 응, 좋아. 너한테만 알려주는 거야. 밤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비밀이란다. 어이가 없었지만, 더 어이없는 건 손가락을 거는 나였다.
밤이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그해 여름에 밝혀졌다. 랜덤 채팅 속 남자가 밤의 짝사랑 상대였다. 밤의 이름을 처음으로 입에 담은 여름과 비슷한 온도의 날에 나는 밤의 랜덤 채팅 소문을 접했다. 밤의 핸드폰에서 랜덤 채팅 앱 알림이 뜬 걸 봤다는 말에서부터 시작된 소문이었다. 밤이 핸드폰 밝기를 최소로 내리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어서 신뢰가 가지는 않았다. 소문은 풍선과 다름없어서, 계속해서 부풀고 부풀다가 한 번 빵 터지면 답이 없어진다. 밤을 둘러싼 소문도 그랬다. 처음엔 랜덤 채팅이었다가, 그러다가 일 학년 때 퍼졌던 남자친구 얘기까지 합쳐져서 랜덤 채팅에서 남자친구를 사귀었다, 가 되고, 완전히 부풀어져서 터질 때는 그 남자친구가 30대에 변태라더라, 가 되어있었다. 증거도 없이 그저 입에서 입으로 넘어 다니며 뼈와 살이 덧붙여진 완벽한 거짓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이 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밤이 좋아하는 사람이 고작 랜덤 채팅에서 만난 남자라는 게 화가 나기도 했다. 최소한 다른 사람일 거란 기대를 하기도 했는데, 밤은 소문을 부정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라 하지, 뭐.
밤은 하굣길에 있는 슈퍼에서 산 쌍쌍바를 반으로 갈라 양이 더 많은 쪽을 내게 건넸다. 하늘을 가르는 매미 소리가 시끄러웠다. 밤은 여전히 핸드폰에 빨간색 케이스를 끼고 있었다. 빨간색 머리 끈은 긴 머리를 묶지 못하고 여전히 손목에 걸려있다. 모든 게 이렇게 뚜렷하게 그대로인데, 밤을 향한 평판만 완전히 뒤바뀐 채였다.
왜?
응?
보통은 억울해하지 않나…….
랜덤 채팅은 사실이라서 그다지 억울하진 않고, 좀 빡치네.
왜?
내가 또 질문을 하자 밤은 대답을 잠시 미루고 조금 남아 있던 아이스크림을 한입에 넣었다. 답을 듣기 위해 밤에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밤은 아이스크림이 녹는다며 내 손을 가리켰다. 아이스크림이 막대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손에 닿기 직전 나는 다급하게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었다. 이가 시렸다. 내가 아이스크림을 데리고 씨름할 동안 밤은 혼자서 말을 이어갔다. 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여자라고 말하는 것보단 그냥 변태랑 채팅하는 애가 되는 게 나으니까. 30대 변태가 남자친구라니. 그런 건 대체 뭘 보고 나온 말이야? 채팅은 여자랑 하는 건데. 그 사람이 들으면 기겁하면서 뒷목 잡겠네. 그렇게 말하는 밤의 어투가 덤덤해서 순간 나도 함께 그러려니, 하고 넘겨버릴 뻔했다. 순간적으로 내가 제대로 들었는지 의심이 들었다. 밤은 내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때보다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대화에 나지막하게 깔려있던 소음이 아득해졌다. 차가 뒤에서 경적을 울렸다. 밤은 내 팔을 잡아 자신 쪽으로 당겼다. 하복을 입어 훤히 드러난 손목에 체온이 닿는 순간 정신이 들었다. 반사적으로 입이 열렸다.
왜?
너 여태까지 뭘 들은 거야.
아니……. 변태랑 랜덤 채팅하는 변태 되는 것보단 차라리 여자 좋아한다고 말하는 게 낫지 않나, 해서.
……정말 그렇게 생각해?
물론, 두 개 다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그래도 전자보다는 후자가 이해받기 쉽지 않을까.
내가 굳이 이해받으려고 해야 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 까지 말했다가 나는 입을 닫았다. 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밤은 숨을 깊게 마셨다가 내뱉었다. 호흡이 길어서 언뜻 한숨처럼 보였다.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돼. 네가 무슨 말 하고 싶은 건지는 알겠어. 근데, 그냥 말 안 하는 편이 좋겠다.
미안.
아냐. 넌 그럴 만해. 애초에 나랑 자라온 환경부터가 다르잖아. 우리 집은 기독교라 좀, 엄격한 편이라서. 물론 선택지가 염병이지만……. 차라리 변태가 돼서 설교문 열 시간 듣는 게 나아. 들키면 난 죽거나, 죽임당하거나 둘 중 하나일걸.
마지막 말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나는 밤의 불행보다는 나와 자신을 다르다고 한 것이 신경 쓰였다. 우리가 그렇게 다른가? 탄생은 다르더라도, 지금 발을 딛을 곳을 찾지 못하는 건 꽤 비슷하지 않나. 나를 액받이로 여기는 집안에서 액받이가 되고 싶지 않은 나는 가정의 일원이 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기독교 집안에서 여자를 좋아하는 밤 역시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열여덟은 어렸다. 너무 어려서 자기중심적인 사고밖에 되지 않았다. 하필 나는 딱 열여덟이었고, 아직 깨닫지 못한 세상의 이치가 너무 많았다.
……근데 이거 나한테 왜 말한 거야?
너는 나랑 비밀 만드는 거 좋아하잖아.
모순처럼 나는 밤이 여자를 좋아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가슴 한구석에 존재하던 질투심이 완전히 사그라졌다. 같이 걷는 내내 찝찝한 땀이 목을 타고 흐르는 데도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힘들었다.
만약 밤이 내게 고백하지 않았더라면 밤은 그저 변태로 기억되어 논란 속에서 졸업했겠지. 성적이 좋았으니 원하는 대학에 합격해 집에서 벗어나 애인을 만들었을 것이다. 끝없는 해를 가진 밤이라는 이름의 그 애는 영원하지 못했다.
*
내가 지어준 이름을 남에게 넘겼다는 사실에 화가 나서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밤이 나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니 꽤 낭만적인 것 같다고. 시간이 조금 지나고 생각해보니 정말 미친놈 같았다. 밤의 죽음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았다. 너무 현실적이라 밤이 죽은 뒤에 나는 며칠간 앓아누워야 했다.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나답지 않게 감정이 조절이 안 됐다. 어쩌면 원래 이런 놈인데 여태껏 모르는 척해온 걸 수도 있다. 뭐가 어찌 되었든, 지금 느끼는 감정들은 내가 감당하기엔 엄청나게 커다란 것들이라 홍의 말을 듣는 내내 울고 싶었다. 오빠의 교통사고 소식에 달려온 할머니에게 온갖 욕을 듣고 뛰쳐나와 옛 동네에 도착할 때까지 한 방울의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자존심마저 버리고 싶지 않아 울지 않은 지 꽤 됐는데, 죽은 지 오 년이나 된 밤의 이야기에 훌쩍이는 건 조금 이상해서 꾹 참았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그 자리를 떠나려 하자 홍이 나를 붙잡았다. 홍은 담뱃값은 해야 하지 않겠냐며 나를 출입 금지 구역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고작 한 개비, 그것도 반은 꽁초로 버린 거였는데. 관계자는 옷 끝자락도 보이지 않았다. 어두워지기 시작한다고 그새 들어간 모양이다. 홍은 걷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며 가끔 카메라를 들었다. 사진을 찍는 기준은 잘 모르겠다. 솔직히 보이는 풍경이 밤이 좋아할 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나는 신발코 앞에 있는 작은 콘크리트 조각을 발로 찼다. 옆에서 카메라 셔터음이 연신 들렸다.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울렸다. 끊어지고 몇 분 있다가 또 울리더니 이젠 아예 계속해서 진동했다. 할머니의 성화를 이기지 못한 아빠의 전화가 분명했다. 받으면 제발 오빠 병실로 오라고 하거나, 할머니가 액받이 주제에 쓸모없다고 외쳐댈 게 뻔한 비디오라 안 받는 게 나았다. 무너진 건물 사진을 찍어대던 홍이 말했다.
“핸드폰 울리는 소리 여기까지 들리는데, 안 받아요?”
“스팸일 거예요.”
“가족인가 보네.”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 애가 말해줬어요. 진 씨네 가족은 좀 무관심한 편 같다고.”
“별걸 다 말했네요.”
“그럼요. 전 그 애랑 이 년간 계속 대화한걸요. 한…… 이년 반 됐나. 그 애가 중학교 삼학년 때 만났으니까.”
나는 발로 잔해 사이를 헤집는 걸 멈췄다. 흙먼지가 하얀 운동화를 뒤덮었다.
“그 애가 처음 만났을 때 밤이라고 불러 달라고 했나요?”
“네. 그래서 진 씨가 그 애를 밤이라고 불렀을 때 난리 났었어요. 제안하지 않아도 밤이라고 불러준 애는 당신이 처음이라고.”
목까지 후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혼자서 오해해 놓고서 화를 냈다는 게 부끄러웠다. 그 후에는 내가 처음이었다는 사실이 갑작스레 와 닿았다. 빨개졌을 얼굴에 부채질하며 홍을 힐끔 보았다. 다행히 그녀는 사진을 찍느라 날 보고 있지 않았다.
“기억력이 좋네요.”
“그 애와의 대화를 자주 돌아봤으니까요.”
“…좋아했나요?”
홍은 카메라를 내리고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서서히 어두워지는 탓에 모자까지 쓴 홍의 얼굴은 보이지도 않았다. 유일하게나마 보이는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왜요?”
“그냥, 아직도 그 애를 잊지 않아서요. 고작 랜덤 채팅으로 이어진 인연인데.”
“그 애는 날 살려줬어요.”
몸이 움찔거렸다. 홍이 말을 이어갔다.
“날 살려주고선 자기는 죽어버렸죠. 너무하지 않나요. 그래서 처음에는 죽어버린 그 애가 너무 미웠는데, 미우면서 또 잊을 수가 없어서……. 그 애와 나눈 모든 대화가 소중해서 계속해서 곱씹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좋아했구나. 홍과 밤은 정말 많이 닮아있다고 확신했다. 특히나 짝사랑이 무지에서부터 비롯되어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 아쉽고 안타까운 짝사랑이었다. 빨간색을 좋아하는 밤과 홍. 채팅하며 좋아하던 밤과 상대방인 홍. 여자를 좋아하는 밤과 여자인 홍…….
“미안해요.”
“뭐가요?”
“미안해요.”
당신이 좋아하는 그 애를 내가 죽인 것 같아요. 뒷말을 잇지 못한 나는 홍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셔터 소리가 났다. 마치 나를 찍는 것 같았다. 울고 싶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밤에 대한 소문에 장작이 더해지며 점점 크기를 키웠다. 혈기 왕성한 고등학생들답게 소문의 수위도 높아졌다. 나는 불의를 못 참는 정의로운 사람이 아닌데도, 밤이 안 좋은 소리를 들을 때마다 신경에 거슬렸다. 밤은 가만히 있으면 지나갈 거라고 했지만,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확률이 더 높았다. 나를 나 자신으로 봐주지 않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 일인지 매우 잘 알았다. 나랑 이미 충분히 비슷해진 밤을 더 비슷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소문의 불씨를 터뜨린 열여덟의 치기는 나에게도 있었다.
교실에서 떠드는 아이들의 대화 주제는 순식간에 휙휙 바뀌었고, 언제 밤이 주제가 될지 몰랐다. 나는 대화를 듣고 싶지 않아 이어폰을 끼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런데도 한 남자애의 목소리가 이어폰 너머 들려왔다. 야, 이미 존나 해봤을 거 같은데. 이거 말이야. 그리곤 왼손의 검지와 엄지로 원 모양을 만들고, 그 원에 반대쪽 검지를 집어넣었다. 쾅. 나는 핸드폰을 책상에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귀에서 억지로 빠진 이어폰이 바닥을 굴렀다.
닥쳐, 좀! 야, 걘 남자 안 좋아하니까 억측 좀 작작 해.
남자애를 있는 힘껏 노려봐주고 고개를 돌렸을 땐 문 앞에 밤이 서 있었다. 얼굴이 시뻘게진 밤은 울 것 같은 눈으로 날 보다가 다른 곳으로 뛰어갔다. 나는 밤을 붙잡지 못했다. 사실 남자애가 말한 ‘야’가 밤인지, 아니면 그냥 다른 애를 향한 호칭인지는 알지 못했다. 밤을 대신해 억울함을 느끼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밤과의 비밀을 타인에게 공유해 자랑하고 싶었던 걸까. 그 이유가 뭐였던 간에 내가 충동적으로 내뱉은 그 한마디가 칼이 되어 밤을 찔렀다.
학교에서 시작된 말이 동네까지 퍼져나가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밤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들키면 난 죽거나, 죽임당하거나 둘 중 하나일걸. 그렇게 말하는 밤의 목소리를 다시 떠올리니 웃음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한동안 동네는 밤의 이야기로 시끄러웠다. 해가 바뀐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밤은 내 앞에 나타났다. 언제나 손목에 있던 머리 끈은 없었다. 온통 무채색이었다.
내가 사람을 죽였어. 어떡하지, 현진아. 내가 죽이는 거야.
눈물 섞인 축축한 고백 이후에 밤은 죽었다. 자기 자신을 죽였다. 밤의 고백을 받은 나는 혼자 남겨져서 유언을 곱씹었다. 어쩌면 이 유언마저도 착각일 수 있다는 일말의 양심은 발아래로 깊이 묻혀둔 채로 말이다. 이름과 호칭도 구별하지 않았는데, ‘내’와 ‘네’를 구별하려고 애쓸 리가 없었다. 밤이 사랑한 빨간색은 까맣게 변색한 양심을 다시금 파헤쳤다. 그리고 꺼내와 내 앞에 던져두었다.
네가 죽이는 거야…….
너는 정말 그렇게 말하고 싶었어? 답할 사람이 없는 물음 대신 끝내 삼켜내지 못한 눈물이 흘러나왔다. 두세 방울 정도가 땅에 뚝뚝 떨어졌다.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홍의 발이 내 앞에서 멈춰 섰다. 머리 위로 무언가 씌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만져보니 모자였다. 계속해서 거슬렸던 그 빨간 모자. 고개를 들려고 하자 홍은 그대로 모자를 꾹 눌러 내 시야를 가렸다.
“당신은 그 애를 좋아했나 봐요.”
나조차도 나를 모르기에 확신할 수 없었다.
“전 안 좋아했어요. …아마도?”
말끝을 흐리는 홍의 목소리가 떨렸다. 홍이 모자에서 손을 뗐음에도 얼굴을 들지 못한 나는 모자만 만지작거렸다. 호흡을 가다듬은 홍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 애가 좋아하겠네요. 곧바로 울려 퍼지는 셔터음에 홍을 보았다. 눈앞이 모자의 챙에 가려져 그녀의 하관만 보였다. 홍은 카메라를 흔들며 미소 지었다.
“저는 오늘로 끝내려고요. 이제 앱을 삭제할 때가 된 거 같아서.”
홍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작게 웃었다. 더 이상 밤과의 채팅 내용을 돌아보지 않으려는 걸까. 그러면 밤을 잊으려는 걸까. 나는 밤 앞에서처럼 홍 앞에서도 질문을 꺼내지 못했다.
“오늘 즐거웠어요.”
홍은 더 이상 내게 어떤 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녀는 꾸벅 인사를 하고서 뒤를 돌았다. 한 치의 미련도 없다는 듯이 시원하게 큰 보폭으로 걸어가는 홍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거뒀다. 홍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 전에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다.
“저기, 이름이 뭔가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홍은 그대로 사라졌다. 홍이라는 명칭과 한밤중에도 무척이나 잘 보일 빨간 모자만을 남기고. 홍, 빨간색, 그 애가 좋아한…….
밤은 홍과 나에게 남은 걸 묻었다. 홍은 나에게 묻었다. 마지막까지 남아버린 나는 어디에 묻어야 할지 몰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홀로 남은 재개발 구역의 분위기가 을씨년스러웠다. 시끄럽게 울리는 핸드폰의 전원을 껐다. 모자를 쓰고 무작정 걸었다. 빨간 페인트가 엑스자로 크게 그어져 있는 주택 앞에서 멈춰 섰다. 이미 깨진 손톱으로 외벽을 긁기보다는 느리게 쓰다듬었다. 미끄러지듯이 내려가 쪼그려 앉았다. 모자를 벗어 품에 안았다. 빨간색이 선명했다. 묻을 곳이 없었다. 묻고 싶지도 않았기에 결국 껴안고 갈 터였다. 먹구름은 여전히 하늘을 꽉 채우고 있었고,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했다. 팔에 힘을 주었다. 어두워지자 더욱 거세진 바람에 흙먼지가 한층 더 일었다. 눈이 따가워서 아주 조금 울었다. 아니, 어쩌면 아주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