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MORE
최현지
여름은 점점 더 살쪄가고 있었다. 물을 머금어 몸집만이 불어난 과일과 같은 모습이었다. 살찐 생각들은 서로를 향해 부딪혔다. 영양가도 없이 여름은 불어가기만 했다. 비가 흘러서 땅에 스며들고 있었다. 나는 싱거워진 과실을 씹으며 물의 지분을 생각했다. 입안에서 느껴지는 과즙은 밍밍하기만 했다. 달지도 않은 귤을 까서 입안에 집어넣었다. 손끝이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옆에 굴러다니는 귤껍질에서 녹진한 냄새가 퍼져 갔다. 장마가 끝났다는 뉴스의 말과 맞지 않게 비는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손에 든 귤이 말랑거렸다. 집안이 어두웠다. 해가 졌기 때문인지 비가 와서인지 알 수 없었다. 소리가 창문을 통과해서 집안에 스며들고 있었다.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눈앞에서 반짝거리는 TV가 계속해서 다른 화면을 비춰주고 있었다. 큰 목소리가 집안에 뚜렷하게 울려 퍼졌다. 아, 이번 기회 놓치면 평생 후회하실 거예요! 한껏 안타까워하는 목소리와는 달리 쇼호스트는 밝게 웃고 있었다. 기억을 지우는 능력을 100% 발휘하도록 도와드립니다! 밝은 조명에 맞춰 하얗게 단장된 스튜디오는 똑같은 상품을 쌓아두고 있었다. 화면에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입욕제가 크게 잡혔다. 흰 통에는 크게 영어가 쓰여 있었다. NO MORE. 나는 그 글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화면 속 그녀의 입술이 말할 때마다 삐뚤어져 갔다. 빨간 입술이 바쁘게 움직였다. 나는 어떤 사소한 괴로움조차 없어 보이는 말간 얼굴을 머릿속에 담았다. 어쩌면 몇 번째 보고 있는 장면일 수도 있었다. 카메라 너머로 마주친 눈이 나를 향해 슬며시 웃고 있었다. 그 안에서 반짝이는 것이 조명인지 카메라인지 알 수 없었다. 내 옆에 놓인 커다란 상자 하나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눅눅하게 끄트머리가 젖은 상자의 정중앙에는 한 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입욕제의 이름이 한가운데에 적혀져 있었다. 천천히 옆에 놓인 휴대전화를 들어 올린 나는 이름을 화면에 새겨넣었다. 반갑습니다, 고객님. 귀에 익은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욕조에 받아놓은 물이 더운 김을 퍼트리고 있었다. 나는 물에 손을 뻗었다. 뜨거운 공기가 목을 막히게 했다. 작게 기침했다. 짙은 안개가 목을 간질이는 것 같았다. 욕조 위에는 미리 까서 올려둔 입욕제가 있었다. 그 옆으로 선반에 놓은 여러 색의 포장지가 보였다. 사은품으로 온 뜯지도 않은 팩이 이리저리 널려있었다. 언젠가 정리해야지, 하면서도 결국은 하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입욕제를 집어 들었다. NO MORE. 홈쇼핑에 나온 상품과 똑같은 글씨였다. 나는 쇼호스트가 했던 말들을 생각했다. 기억 삭제의 효율을 올려줍니다. 부작용도 없습니다. 어떻게 그걸 단언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대답하지 못하는 화면은 계속해서 모습을 바꾸고 있었다. 생방송이었다가, 녹화된 비디오였다가, 다시 생방송으로. 빨간 입술의 쇼호스트였다가, 욕조에서 편안한 얼굴을 하는 모델이었다가, 다시 쇼호스트의 얼굴로. 그녀가 웃을 때마다 주문 수가 증가한다는 자막이 보였다. 나는 손으로 입욕제를 매만지다가 손을 바라봤다. 지문 사이사이로 입욕제 가루가 검게 묻어나왔다.
인간은 망각을 통해 성장하는 동물. 기억 삭제는 인간이 진화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단순히 잊었다고 생각하는 건지, 정말 기억 자체가 사라져버린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기적이자 행운으로 여겼다. 어릴 때부터 어렴풋이 가지고 있는 이 능력은 영국에 있다는 어떤 과학자를 통해 발견되었다. 그저 묻힐 수도 있었던 능력을 사람들은 인터넷을 통해 퍼뜨렸다. 능력은 퇴화하는 무언가에서 우리가 되찾아야 하는 것으로 바뀌었고, 어느 순간부터 신의 선물처럼 여겨졌다. 발달된 의료 기술로 기대수명이 늘어난 것처럼, 이 기능은 사회의 기득권인 어른 때문에 부활했다. 어린아이에게 예방주사와 함께 놓는 주사에는 능력을 저지하지 않는 약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결국 모든 것은 주류의 의견을 따랐다. 찬성과 반대로 팽팽히 대립하던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당연한 것 혹은 유행에 빨려 들어갔다. ‘쓸모없는 기억을 지워서 우리 아이의 학습 능력을 길러요!’ 학습지 회사에서 한창 하던 광고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능력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서서히 퇴화하는 속도도 빨라져 갔다. 가지고 있던 것을 놓지 못한 어른들은 자신의 변화를 인정하지 못했다. 그 순간, 이를 방지하는 상품이 세상에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입욕제였다.
나는 손으로 한 번 물을 쓸어내린 뒤, 물에 발을 담갔다. 여전히 어느 정도 뜨겁다고 느껴지는 온도였다. 발이 서서히 빨갛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수증기로 가득 찬 공간이 더웠다. 손에 쥔 입욕제가 흔들거렸다. 검은색 공에서 나오는 가루를 쓸어내릴수록 손에 묻어났다. 몸이 뜨거운 증기에 닿아 이완되는 느낌이 들었다. 새벽 두 시의 하늘 같은 바다가 욕조에서 소용돌이를 치며 넘실거렸다. 발에 차이는 액체의 느낌은 언제나 익숙하지 않았다. 발장난을 치다가 서서히 눈을 감았다. 꽃 향과 비슷한 냄새가 뜨거운 공기와 함께 머물렀다. 기억의 언저리가 안개로 둘러싸이는 느낌이었다. 뿌연 공간 속으로 생각했던 것들을 정리하려 했다. 어릴 때부터 계속 들어왔던 주의사항을 읊조렸다. 해가 진 뒤에 시작할 것. 목욕할 때 실시할 것. 마지막으로는 절대로 이름에 관련된 추억을 떠올리지 말 것. 질릴 정도로 들었는데, 새삼 몸이 굳는 기분이 들었다. 등 뒤로 냉기가 느껴졌다. 나이와 관계없이 망각 관련 제품을 살 수 있는 것은 권리를 존중해주는 것일까. 잊을 수 있는 권리. 의미 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기억을 지운다는 건 늘 상념을 남겼다. 이마에서부터 흐르는 것이 땀인지 수증기인지 알 수 없었다. 입안에서 몽글 거리던 숨을 뱉어냈다. 손에 쥔 입욕제 가루가 서서히 물에 퍼져 가고 있었다.
머리를 천천히 숙였다. 울렁거리는 물이 투명했다. 잉크처럼 물 사이로 흐트러지는 액체가 검었다. 소용돌이 모양으로 퍼지던 액체는 뭉치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공 모양이었던 입욕제가 서서히 풀어져 갔다. 계속해서 바뀌는 모양이 눈에 띄었다. 금색 반짝이들이 퍼지고, 회색 가루가 그 자리를 물들여 갔다. 그리고 다시 검은 가루에 사라졌다. 가운데에 모였다가 사라지고, 다시 모이는 것이 마치 궤도를 도는 것 같이 느껴졌다. 내 기억을 헤매는 가루. 그건 기름진 내 머릿속에 달라붙어 새카맣게 변해버릴 것이다. 그렇지만 언젠가 긁히고 헤쳐져서 결국은 끝까지 메우지 못할 자리를 다시 만들어내겠지. 빨려들어 갈 듯 어두운 물속이 두려웠다. 그 안으로 들어간다면 지워서 비어있는 기억들이 돌아오는 걸까. 입욕제를 쓸 때마다 사라지는 기억들 틈으로 들어오는 것은 한 가지 사실이었다. 지금 내가 이걸 지운다고 해도 결론적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 알고 있다고 해도 결국은 다시 욕조에 몸을 뉘었다. 흐트러져서 사라져버린 입욕제가 서서히 뭉쳐갔다. 알파벳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글로 보이기도 하다가 전혀 알지 못하는 다른 문자로 바뀌었다. 나는 그 안에서 떠올리고 싶지 않던 무언가를 떠올려야 했다. 쌓인 과거의 입욕제 가루를 털어내며 기억을 더듬었다.
안개 속 기억들의 안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언제나 같은 장면이었다. 어떤 남자의 멱살을 잡은 또 다른 남자. 옆에 놓인 야구 배트. 그의 손을 막기 위해 애쓰는 여자와 잠이 든 척을 하는 나. 애써 감은 눈이 시렸다. 눈물이 나려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덤덤해졌다. 애 들어. 좀 더 작게 말해. 여자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감정에 취한 듯한 낮은 목소리가 문을 넘어 나를 위협했다. 좌우로 흔들리던 소리는 벽에 튕겼다가 이내 스며들었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이불 끝을 잡았다. 차가운 이불이 바스락거렸다. 방에 걸린 시계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초침이 유독 느리게 흘렀다. 손이 불안정하게 떨렸다. 이불 표면이 출렁거렸다. 밖에서 소리치는 사람들에게도 내 모습이 보일까. 창문에서 오는 냉기가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올라오는 듯했다. 기억을 검은 파도 속 깊숙이 떠밀었다. 구겨진 이불 끝과 닮은 파도가 흔들렸다. 나는 그 안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따뜻한 바다가 눈앞에 있었다. 아직도 연한 귓바퀴에 울리던 둔탁한 소리가 메아리를 치고 있었다. 나는 따뜻한 블랙홀 안에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울린 건 상냥한 목소리였다. 내가 알고 있는 목소리 같았다. 시계가 똑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름을 부르며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잊히지 않았다. 그녀는 무슨 말을 했던 걸까. 이건 내가 잃어버린 기억인 걸까, 잊고 싶은 기억인 걸까. 처음으로 기억을 꺼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떠올린 순간 바다는 땅을 보였다. 아주 까맣고 진득거리는 가루가 기억을 휘감았다. 서서히 사라지는 시야 너머로 따뜻함이 사라지고 있었다.
배수구 주위로 얕은 소용돌이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반짝임이 보였다. 저건 내 기억의 일부인 걸까. 흐릿하고 뿌옇게 번진 시야가 불편해서 눈을 비볐다. 물에 너무 오래 있어 머리가 아팠다. 나는 배수구 위로 천천히 손을 올렸다. 깊은 어딘가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며 빨아 들여가고 있었다. 작은 구멍 안으로 사라지는 물이 보였다. 방금까지 눈앞에 있던 큰 파도는 작디작은 소용돌이에 사라져 버렸다. 검은 잉크가 퍼진 것 같은 물이 종아리 부근에서 찰랑거렸다. 나는 손에 붙은 흰 종이를 바라봤다. 손을 넣었을 때 붙은 것 같았다. 검은 잉크가 물에 젖어 번져 있었다. 그 안에는 선명하게 보이는 글씨가 적혀져 있었다. ‘NO MORE’ 손에 상표처럼 붙은 스티커를 천천히 쥐었다. 꼴꼴. 욕조는 소리를 내며 검은 물을 삼켰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욕실 벽에서 튕겨 나갔다. 멀리서 끄는 것을 잊은 TV 소리가 들렸다. 이거, 안 써보신 분 없으시겠죠? 상냥하고 밝은 웃음소리가 온 집안에 퍼졌다.

최현지, 한양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2학년
2001년 경기도 광명 출생.
눈에 담은 기억을 곱게 빚어 글을 쓰는 사람.
작가 인터뷰
Q. 작품 속에 나오는 입욕제 광고 중에 ‘기억을 지우는 능력을 100% 발휘하도록 도와드립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만약에 그 입욕제가 있다면 사용하실 건가요?
A. 개인적으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은 숨기거나 잊고 싶은 기억이 있다고 생각해요. 저에게도 있고요. 흑역사라고 하잖아요. (웃음) 지금보다 더 어릴 때는 단순히 그 기억이 떠오르는 순간마다 괜히 괴로워져서 잊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요. 이제는 그때가 있어서 지금이 있는 거구나, 싶어져서 아마 사용하지 않을 것 같네요.
Q. 기억을 삭제하는 입욕제란 소재부터 특이하고 흥미로웠는데요. 입욕제의 이름이 No more인 것도 소재와 잘 어울리는 의미심장한 이름 같습니다. No more은 그이상 …하지 않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저는 이 뜻을 보고 입욕제를 물에 넣음으로써 기억에 관해 그 이상 생각하지 않다로 해석했는데 맞을까요? 이름을 No more로 설정한 작가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맞는다면, 작가님에게 기억은 어떤 존재인가요?
A. 사실 입욕제 컨셉은 친구에게서 생일선물로 받은 LUSH 입욕제에서부터 떠올랐어요. 너무 기분이 안 좋을 때 보글보글한 거품에 이 기분과 생각 그리고 기억이 전부 씻겨져 가면 좋을 텐데, 라고 생각했거든요. 질문자님이 하신 것처럼 NO more의 뜻은 ‘그 이상 아무것도 떠올리고 싶지 않다’혹은 ‘그 이상 생각하지 않다’라는 의미가 맞습니다. 또 숨겼던 의미 중 하나는 ‘그렇게 계속 기억을 지우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뜻도 있었어요. 어느 쪽이든 해석하시는 대로 흘려가며 읽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곳이 작품의 뜻이라고 생각해요.
제게 기억은 판도라의 상자 같아요. 겉으로 보기에는 반짝반짝하고 속이 궁금하지만, 또 열어보면 그다지 밝지만은 않았던. 그렇지만 또 지나가면 희망과 고운 것들이 손에 쥐어져 있죠. 우리는 언제나 미래를 반짝반짝하고 아름다운 것일 거라고 멋대로 기대하고, 현실의 고난과 아픔에 부딪히지만, 과거의 일이 되면 어느샌가 ‘참 좋았었지~’라며 포장하고 있잖아요. 참 다양한 모습을 가진 하나의 상자 같다 생각합니다.
Q. 누구에게나 지우고 싶은 기억이나 상기시키고 싶지 않은 기억이 있습니다. 소설 속 작가님의 세계에서는 ‘No more’ 입욕제를 사용하면 지우고 싶은 기억이 지워진다고 합니다. 기억을 지워주는 입욕제가 대중화가 됐는지 홈쇼핑에서도 광고를 합니다. 이 입욕제를 사용한 사람들은 기억을 지우고 덜 아픈 삶이 가능해졌을까요?
A. 글쎄요. 음 비유가 이상하긴 하지만, 반영구 눈썹 문신 같은 거라서요. 입욕제의 효능은. 기억을 지워도 몇 달, 반년 내로 기억은 조금이라도 다시 돌아올 거예요. 하지만 기억을 잊었던 순간의 둔감함이 좋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사람들은 몇 번이고 목욕물에 뛰어들 거라 생각해요. 그게 과연 덜 아픈 삶일까요? 사람마다 정답이 다른 질문일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