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역국 외 2편, 엄유진

 

미역국

그때 물이 끓을 것이다

찬장에서 미역을 불릴 그릇을 꺼냈다

미역을 뜯었다면

오늘 밤 당신의 역할은 삶의 지축을 던지는 것이다

뚜껑을 밀어낼 기세로 여러 번 끓어오른다

장거리 여행에서 기지개가 생겨나는 이유

살아있다는 기억을 손끝까지 가져간다

심심한데 이야기 들어줄게요 아직 한참 가야 하는 걸요

신발을 벗고 좌석에 완전히 몸을 기댄다

침묵에 잠긴 미역은 물에서 한참을 구부러져 있다

그릇에 담을 때

국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을 수는 없다

창밖을 보고 싶은데

속에서 불어나는 마음은

자꾸 내 자리에만 불을 켜둔다

수분크림의 세계

  셀 수 없이 많은 세수를 했다 눈을 감고 크림을 바르고 바르고 또 바르다가 밖으로 나간다 버스에서 중심을 잡을 수 없으면 두 발을 잃어버리고 만 것 하차 벨이 울릴 때마다 광고에서 발을 찾아주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당장 전화를 걸었는데 뚱딴지같은 소리 하지 말고 꺼지라는 대답을 들었다 발은 이미 주인을 찾아갔다면서

  셀 수 없이 많은 그림자가 머리를 덮는다 눈을 감고 생각한다 누가 내 발을 가져간 걸까 양말을 신겨 줬을까 몸에 있을 게 없다는 온기를 느낀다 벨을 누르고도 내리지 못한 여자가 발을 동동 굴렀다 없어야 할 시간이 생긴 것 같다 버스는 쉼 없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감기

아무도 마시지 않았어
컵이 그대로였거든

열이 나는 아이의 울음은 토마토주스의 발현

말라가는 자국은
몸에서 한 번도 떨어져 본 적이 없었어

햇빛으로 얼룩진 채 자라고 휘어지고
기괴하게도 굵어지고 나면

여섯 살을 그만 멈출 거야
가라앉은 얼굴을 찾을 거야

열을 떨어뜨리기 위해
기울어지는 지붕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씹기 좋은 속살은
왈칵 쏟아지는 일을 담당하지
바지의 지퍼를 채우고

정성스럽게 머리를 감았다
정수리부터 부드럽게 껍질을 씻겨주었다
말랑하고 둥근 배는 따뜻하다

무언가를 닮는 것처럼 천천히 가라앉는
심장의 붉은 빛 박동

엄유진, 한양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2학년
현재 체온은 36.3도이다.

 

작가 인터뷰

Q. 작가님이 쓰신 세 작품 모두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는데 저는 그중에서도 <토마토주스>에 대해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작품의 ‘열이 나는 아이의 울음은 토마토주스의 발현’이라는 구절에서 작가님은 어떤 생각을 하며 이 구절을 쓰셨는지 궁금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A. 시를 처음 쓸 때 체온이라는 현상을 구체화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과정이 쉽진 않았지만요. 최근에 열이 나는 감기를 앓았던 적이 있었는데, 누워있는 동안 몸이 뜨겁고 가라앉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토마토주스처럼요. 최대한 주스와 체온의 형태에 집중해서 쓰려고 노력했어요.

Q. 시의 중심 소재로 만든 연결이 눈에 띄는데요. 세 편의 연결 중에 어떤 것이 가장 끊어지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A. 이미 한 번 떠올린 생각은 다시 떠올리지 않아도 이 세계와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리는 거죠. 시에 나온 “미역국”이나 “수분크림”은 그때 화자가 생각했던 일의 집약과도 같고요. 두 시와는 다르게 <감기>에서의 “체온”은 시나 화자를 나타내는 방식이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토마토주스의 연결이 아니라 체온의 연결이 된 것이고요. 시를 읽으면서 그 차이에 대한 해석을 자유롭게 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Q. 시를 읽으면서 호흡이 속도감이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시인님께서는 시의 리듬을 어디서 찾는지 궁금했습니다.

A. 저도 아직 시에서 리듬이 무엇인지 답을 내리지 못해 찾고 있어요. 지금은 우선 화자가 얼마큼 말할 수 있는지 먼저 생각해 보는 것 같아요. 저는 화자에게 전적으로 말하는 일을 맡기다 보니까요. 요즘 제 주변에 있는 화자들은 보통 한 번 말할 때 하나만 말하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필요한 말만 하는 게 가장 중요하겠죠.

Q. 3편의 시 모두 마음에 남지만, 저는 특히 수분크림의 세계가 마음에 오래 남습니다. 특히 “발을 잃어버리는 일”을 유진 작가님만의 비유로 활용해 특별하게 표현한 거 같습니다. 실제로 발을 잃어버린 것 같은 경험을 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A. 아무래도 한 자세로 오래 앉아 있으면 발을 잃어버리게 되죠. 피가 통하지 않는 순간 내 몸에 발이 있다는 기억을 잊어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시를 쓰면서 안 사실인데, 얼굴에 수분크림을 많이 바르면 오히려 흡수가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무엇이든 넘치기 시작하면 원래 의미를 잃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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