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사촌 외 2편, 임초록

사촌

사촌이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초록색 방수 페인트가 칠해진 옥상 바닥에
고추들과 너부러져 햇빛을 받던 얼굴이었다

폭이 좁은 욕조에 함께 몸을 욱여넣을 때
맞닿았던 무릎이 간지러웠다

오른 쪽, 왼 쪽을 번갈아 긁어내며
이름을 발음할 때 혀가 말리는 모양에 대해 생각했다

어릴 적 개울에서 잡은 가재가 떠올랐고
가재는 몸이 둥그렇게 말린 채로
불투명한 페트병 바닥을 이리저리 부유했다

고향으로 내려가는 고속버스에서는
오이비누 향기가 났다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나와, 가재와, 사촌이 한 데 뒤엉켜
서로의 무릎 사이에 머리를 들이받고
지난 별명들을 반복해 토해내고 있었다

신포동

오래된 단골 통닭집
당신과 함께 마주 앉아 튀긴 닭을 기다린다

천장이 낮은 이 층 구석 자리
벽지에 매직으로 그어진
누군가의 사랑, 이별, 그리고 다시 사랑

고소한 기름 냄새
케첩과 마요네즈로 뒤덮인
얇게 채 썬 양배추
가느다란 당신의 손가락이
아삭하게 내 손에 엉겨 붙는다

콜라 잔에 담긴 얼굴이 올록볼록 부풀다가
견디지 못하고 퐁, 포옹, 퐁 하고 터지고 있다

당신이 통닭 무를 집어 든다
나는 딱 그 무만큼의 높이로 떠올랐다가
입술을 통과해 분해되고 소화된다
당신이 된다

을왕리 해수욕장

해수욕장은 폐장한지 오래
바지런히 바위 사이를 오가는 갯강구들을 보며
나는 배가 들어오지 않는 부둣가에 서 있다

꽁꽁 얼어붙은 얼굴로
내가 사랑했던 것들을 묵념한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처음 읽었던 열아홉과
자몽향 소주에 꽂혀있던 분홍색 빨대,
바다로 돌아간 늙은 개의 부드러운 털을

거칠게 파도가 쪼개질때
그 안에서 굴러다니는 것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조개껍질과 동그란 유리병 조각
오랫동안 바람과 파도를 맞으며 마모된 것들은,

아름답다

아이처럼 울부짖던 갈매기들이
파도 위에서 꼿꼿하게 목을 쳐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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