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입 신고 외 2편, 문수빈

전입 신고

집 속에 집 속에 집 속에 집
너는 아직도 여기서 살고 있나요
바사삭 내 몸에 금이 가는 소리

새싹처럼 돋아나기 시작했을 때부터
기록되던 프로젝트였죠

과자처럼 부서지는 나의 우주
빅뱅은 사실 폭발이 아니라 균열이었다는 것을

어떤 여자에게는 내가 침략자이자 구원자였다는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

영원히 엄마의 엄마가 될 수 없겠지
이곳에서 우리는 더 이상 같이 살 수 없으니까요

집 안에 집을 지으면 안 되는거야

농부가 잡초를 뽑아내듯이
천천히 쌓아올린 비밀기지를 허물고
그 잔해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이제 마땅한 곳에 씨앗을 뿌려야지
창을 열면 어린 시절의 울타리가 보이는 곳을 찾아야지
그 위로 다시 달콤한 줄기가 솟아나기를 기다려야지

아픔과 간지러움을 구별하지 못하는 잇몸을 가진 아기처럼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울어야지
하루가 다르게 어긋나야지

집 옆에 집 옆에 집 옆에 집
울타리는 세우지 않았습니다
서로 자주 노크해주기로 해요

엄마는 이제 엄마가 아닌 시대를 맞이했다

회전 인생 전문점

조금만 낯설어도 음식을 삼키지 못하는
어린아이의 감각으로
터전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자유를 구원의 도구로 이용하다니
기괴한 삶의 분양 방식

인간이라면 수십 번은 방문한다는
회전 인생 전문점
돌아오지 않는 것들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치를
영영 떠나버린 연어초밥에게서 배웠지만
나와 이렇게 닮았을 줄이야

갈림길을 따라 움직입니다
코너를 지날 때면 내 몸도 따라 꺾입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는 건 거짓말이죠
당신은 결국 선택했을테니까

거대한 시스템을 만든 이는
우리가 서로의 하루를 의심하도록 설계한 게 분명해

돔 속에 박제된 사람들의 어떤 순간
여러 인생이 동그랗게 접시에 담겨서
드드드 돌아가고 있습니다

언젠가 나도 저 속에 담겨서 나를 전시하는 날이 올까요
아이들은 내가 위태롭게 서 있는 삶을
따라하고픈 춤으로 볼 수도 있을테지

수많은 오해를 통해 조각이 맞춰지는 피규어
다른 얼굴 같은 포즈를 하고 있다면 하나도 재미없을 것 같아요

삶의 끼니 때마다 주어지는 분양권
나는 다시 태어나 이곳에 오면
내 삶을 거들떠 보지도 않을 것 같아요
선택받지 못한 접시를 보며 입맛을 다시겠죠

비 와 언니

하늘에서 언니들이 떨어지고 말았다

그 바람에
바구니에 언니들만 잔뜩 담고 말았다

정확히 어디서 왔는지는 모른다
가끔 작은 점 같은 그들을 상상했을 뿐이다

아무 번호나 누르고
연락처에 상상언니를 심어뒀을 뿐이다

진짜복숭아를 바닥에 다 쏟고 비명을 질렀다

복숭아는 언니 같아서 쉽게 멍들고
한 번 멍든 곳은 돌아오지 않는다
놓치기 싫었다

하나를 바구니에서 내려주고 나면
그녀도 어디서 바구니를 찾아와 나를 도왔다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은 언니를 주는 건가요?
질문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알맞게 익어 적당히 새콤한 복숭아처럼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당도를 선물받고 싶었어
그걸 뛰어넘는 법도 배우고 싶었어

나는 과육을 씹으며 뭉개진 발음으로 답한다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져
멍든 복숭아가 됐다

세차게 비가 내리며
과육 위에 날개가 젖은 벌레들이 추락했다
그래도 달콤한 냄새가 났다
다음 해에도 그 다음 해에도 열매가 자라났다

문수빈, 한양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2학년
미미의 마리씨앗에 싹이 났다.

 

작가 인터뷰

Q. 비 와 언니를 제외한 2편에서 ( )의 연결이 눈에 들어옵니다. 탄생과 삶. 조금 추상적인 것 같으면서도 자아와 연결 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평소 삶과 자아에 관한 사유를 자주 하는 편이실 거 같은데, 그렇다면 그 사유의 기록들은 시로 기록하는지, 일기로 기록하는지도 궁금합니다. 사유를 어떻게 기록하고 계시는가요?

A. 재미있는 장면이 떠오를 때마다 메모장에 저만 알아볼 수 있게 적어두는 습관이 있습니다. (발목, 허무함이란 뭘까, 아이가 동상처럼 서 있다.) 전에는 조금 이따 메모해 둬야지, 하고 잊어버린 게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내가 까먹은 게 세기의 시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우스운 후회를 하다 보니 메모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런 습관을 들인 뒤로는 일기를 쓰려고 해도, 어느 순간부터 사실은 사라지고 시가 남게 되었습니다. 사유할 때마다 제가 조각조각 흩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그런데 시를 쓰고 나면 퍼즐의 일부를 맞춰놓은 기분이 듭니다.

Q. (탄생의 연결)에서 “어떤 여자에게는 내가 침략자이자 구원자였다는 “와 “영원히 엄마의 엄마가 될 수 없겠지”, 그리고 “엄마는 이제 엄마가 아닌 시대를 맞이했다”가 특히나 인상 깊었습니다. 딸과 엄마의 이야기라 애틋하면서도 슬픈 목소리로 전달되는 것 같았어요. 여기서 엄마는 이제 엄마가 아닌 시대를 맞이했다고 하는데 시인님께서는 엄마가 엄마가 아닌 시대는 어떤 시대를 상징하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A. 말 그대로 ‘엄마가 엄마가 아닌 시대’입니다. 화자가 독립하거나, 새로운 가정을 꾸리면 엄마는 무엇이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원한 엄마, 영원한 부모라는 말이 있지만 그런 건 어쩌면 간판일 뿐이라고 느껴졌어요. 그렇다면 화자는 이제 어디로 갈까, 엄마는 무엇이 될까, 새로운 관계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고민하며 쓴 시입니다.

Q. ‘회전 인생 전문점’은 제목부터가 재미있던 시였습니다. 저는 이 시를 읽으면서 내 인생은 무얼 전시하여 회전 시키고 있을까? 라는 물음을 던져보았던 것 같아요. 시인님께서는 회전 인생 전문점에서 어떤 선택을 하여 어떤 춤을 추실지 궁금합니다.

A. 사람들이 ‘삶에 몸부림친다’는 말을 떠올렸습니다. 그 모습이 타인에게는 춤추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았어요. 남의 떡이 커 보인다고, 지금 나의 모습이 지겹고 괴롭지만 누군가에게는 진정한 행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어요.

Q. 작가님의 시에는 ‘빅뱅’(전입 신고), ‘인생’(회전 인생 전문점)과 같이 크기가 큰 단어들이 들어가 있는데요. 작가님은 이렇게 큰 단어들을 어떤 식으로 다루시나요.

A. 지금 이 시기가 커다란 단어들을 놓지 못하는 때인 것 같아요. 커다란 단어는 의미를 너무 많이 담고 있어서 지양하려고 했지만, 저는 그 단어들을 저와 빗대어 비유하고 싶었어요. 나에게는 ‘빅뱅’이 일어났는데, 그 모습이 우주의 폭발과는 다른 느낌이었고,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 전입 신고라는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나중엔 커다란 단어 없이도 이런 사유의 시를 쓸 수 있게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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