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색연필, 금지연

  색연필

 

  불행이 어떤 맛과 향일지 생각해 본 적 있니

 

  신년을 맞아 부러진 색연필을 깎았다

  마음이 머무를 때 사라져 갈 용도

  어릴 적 미술 학원에서 배운 유일한 것

 

  미끄럽게 지나가는 커터날

  도려냄

  튀는 심

  가장 작은 폭죽

 

  묘사가 좋지만 왠지 얕았던 시집은 한두 번의 밑줄로 해석하기

  표현이 좋지만 닿지 못했던 시집은 문장만을 품고 떠나가기

  천국은 모국이 아니라던 시집은 잔뜩 뭉툭해지기

 

  시에 신이 등장한다면 그건 불신 또는 원망 또는 동성애

  그만 믿을 때가 됐지 남겨진 이들은 계속 용서를 바라며 손을 모으지만

 

  불타 버린 도서관은 정말 있었던 일인지

  먼지와 지하와 여름과 멸망을 왜 그리 사랑, 했는지

 

  그곳에서부터 불행은 시작됐다고 했잖니

 

  덩치 큰 단어는 꼭꼭 씹어야 해

  조각낼수록 풍미가 살아나니까

  전부 다 보여 주진 말자 바바리맨도 바바리는 입었는걸

  누구도 옷자락 아래 묻어 둔 마음을 궁금해하지 않았고

 

  나는 아직 불타지 않은 도서관에 헐벗은 채로 웅크려 앉아

  불행을 조금씩 뜯어 곱씹었다

  쥐포 맛이 나서 이대로 책갈피처럼 구워 버리고 싶었다

  거대한 알코올램프가 된다면 중독 같은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텐데

  라이터 속 액체가 흐르는 모양새를 지켜본다

 

  엉덩이에 묻은 글자를 털어 낸다

  손에서는 화약 냄새가 났다

  누군가가 뿌렸을 북퍼퓸의 잔향인가 그런 게 연필심에도 묻어나던가

  킁킁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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