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정거리 바깥의 우리
도망치는 건 어렵겠구나. 복도에 붙은 방을 둘러보며 든 생각이었다. 다닥다닥 붙어 있어도 온기라고는 찾기 어려운 네모의 향연이었다. 속으로 삼킨 아쉬움과 달리 구둣발의 소리는 경쾌했다. 물론 옆에서 나의 어깨를 잡고 걸어가는 그녀의 얼굴은 굳어있었지만. 푸른 셔츠의 깃을 칼각으로 다린 것 같아도 이리저리 구겨진 걸 보아하니, 자취한 지 얼마 안 된 신입인 듯했다. 그녀를 보며 무의식적으로 내 어깨를 툭툭 털었다. 주름져봐야 큰 문제는 없을 텐데도 그랬다. 습관이었다. 조그만 창문을 타 넘고 들려오는 여러 소리가 소란했다. ‘3 상 6’ 방. 문이 열렸고, 여덟 개의 눈동자가 내 옆의 여자로 향했다. 그리고 내게 다다랐다. 눈동자에 담긴 건 호기심, 두려움, 경계, 무시……. 결코 유쾌하진 못했다. 신참이다. 인사해. 내 옆의 여자. 그러니까 교도관의 목소리가 들렸고 나는 마침내 감방에 들어왔다. 그야말로 도둑년들의 천지였다.
철창의 문이 닫혔다. 여전히 여덟 개의 눈동자는 나를 노렸다. 하이. 손 하나를 올리고 짤막한 인사를 건넸다. 네 여자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이게 아닌가. 손가락을 쥐었다 펴며 방을 둘러보았다. 좁고, 소박하고, 께름칙했다. 짧은 숨을 내쉬었다. 히피 파마머리를 하고 노골적으로 내 얼굴을 훑던 여자가 말했다. 삼육? 십팔. 이건 본능에 가까운 대답이었고. 이 시발년이! 구구단으로 시작된 인사는 구타로 변했다. 단발머리의 젊고 덩치가 큰 여자는 쇠 창을 툭툭 치며 교도관을 불렀다. 나머지는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들은 싸움을 말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머리, 가슴, 배. 다시 가슴, 배, 머리. 곤충도 아니고 세 군데만 공략하던 그 여자는 씩씩댔다. 힘이 빠진 탓이었다. 지금 보니 그녀는 어깨뼈가 불거지도록 말라 있었고 체구 또한 작았다. 조그만 얼굴에 눈이 크고 코가 작달막했다. 꼬리가 내려간 눈을 치켜뜬 그녀가 말했다. 너 뭐야, 초면에 왜 욕부터 해? 구구단 정답 말한 건데요. 근데 왜 반말이세요. 꼬우면 너도 해. 그래. 탁구를 하듯 오간 대화가 끝이 났다. 정적이 흘렀다. 교도관은 왜 안 와? 복도와 나를 번갈아 흘깃대던 그녀가 말했다. 삼육에 십칠 아니야? 십팔인데. 아아……. 멍청한 년. 저 멀리서 정장 구두 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여자들의 모성애란 기본 옵션 같은 게 아니었다. 배가 징그럽도록 둥글게 부풀었던 어느 날, 하혈하며 했던 생각이었다. 기억으로부터 8개월 전쯤 나는 애를 뱄다. 섹스는 의도였지만 임신은 아니었는데. 술은 사람을 멍청하게 만들었다. 나와 여러 의도를 같이한 그 애는 연구실 동기였다. 푸석푸석한 파마머리에 둥근 안경과 녹색 체크 셔츠를 자주 입던 남자애. 민망할 때면 정돈되지 않은 머리를 벅벅 긁던 걔는 흡연 구역에서 고백을 해왔었다. 평범한 대학원생들의 연애였다. 우리는 적당히 피로했고, 부담 없이 지질구질할 곳이 필요했다. 걔는 나를 누에나방이라고 불렀다. 주머니 속 담뱃갑을 쥐고 걸어가는 그 애에게 물었다.
“왜 하필 누에나방이야?”
그 애는 몇 번 턱을 쓸어내리면서도 걸어가는 걸 멈추지 않았다. 골똘히 고민할 때의 습관이었다. 자리를 잡고 내 입에 물린 담배에 불을 붙여주면서도 걔는 여전히 궁리했다. 나의 질문이 마치 미해결 물리학 문제가 된 것 같았다. 입에 물린 담배의 따끈함이 전해져 올 때쯤 대답이 들려왔다.
“성충이 된 누에나방은 인간에게 길들어져 입이 퇴화한대. 아무것도 섭취하지 못하는 거야. 그래서 자손을 낳으면 아사한대. 연구실에 틀어박혀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우리는 실험 결과를 낳고 죽을 게 뻔하잖아. 어때, 닮지 않았어?”
그 애의 말을 듣던 나는 웃음이 났다. 그 남자애도 따라 웃었다. 어깨에 기대어 웃던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서로를 누에나방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날이었다. 실수이자, 죄악의 시발점. 인생 최악의 수였다.
낳지 말자. 우리 아직 어리잖아. 맞는 말이었다. 대학원생이라고 한들 아직 이십 대였다. 자신을 챙기는 일도 버거운 게 사실이었다. 우리의 연구는 거의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얼마 전 지도교수는 미국에 같이 가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다. 바퀴벌레에 꽂힌 교수의 변덕이었다. 나는 두 남자의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낳을 거야. 죄송합니다. 객기였다. 분노와 좌절이 돌아왔다. 부풀지도 않은 배를 보며 주먹을 쥐었다. 세포 주제에. 떨어질 생각조차 안 했다. 몇 번이나 계단을 굴렀는지. 칼과 배를 보며 얼마간 고민했는지. 저 남자는 모르겠지. 수술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할 수 없었다. 오랜 지병은 이렇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마취도 임신 중단도 못 하는 몸은 점점 허약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낳고 죽이자. 내 속에서 죽일 수 없다면, 꺼내서 죽여버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본능적인 사랑, 모성애. 그런 건 없었다. 작은 세포의 성장은 내게 장애물이었다. 나는 누에나방이 아니었다. 아사할 수 없었다.
징벌방은 좁았다. 변변치 못한 방에 불쌍한 척 몸을 웅크렸다. 파란 죄수복이 부스럭댔다. ‘3 상 6’, ‘2148’ 내 이름을 대신할 부호들이었다. 나를 불러주던 사람은 누가 있나. 역시 엄마뿐인가. ……아. 작게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모전여전인지, 엄마도 날 그렇게 사랑해주는 축은 아니었다. 그저 인간으로서 예의를 갖추었을 뿐이었다. 엄마에게 있어 나는 도구였다. 아버지와의 결속. 법보다 강한 연결이었다. 나는 존재로 쓰임새를 다했다. 나의 실재는 엄마는 돈과 명예를 안겨주었다. 너무 무른 탓에 곧 터져버릴 것 같은 명예였지만. 괘념치 않았다. 엄마는 그런 척을 잘했다.
일 년에 한 번쯤 보던 아버지는 열여덟 살 생일날 내게 커다란 곰 인형을 주었다. 오마카세 식당에서였다. 그런 걸 안고 잘 나이는 지났는데. 세 사람 사이에 민망한 정적이 돌았다. 엄마는 이름을 불러주며 나를 위로했다. ……아, 너는 아직 어려서 모를 수 있지만, 어른들은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때가 많아. 아빠가 많이 바쁘셔서 그런 거야. 이해해줄 수 있지? 입꼬리를 올리고 식탁 아래 손가락을 하나둘 폈다. 당연하다고 대답하려던 차였다. 우리 딸, 생일 축하한다. 화장실에 갔다 온다던 아버지는 아이패드를 사 왔다. 신형이었다. 가방에 있는 다른 색, 같은 기종의 물건이 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며 웃었다. 저 인간은 내 이름을 까먹은 게 분명했다. 나는 곰살맞은 척을 잘했다.
감방에 오기 전에도 엄마는 그렇게 불러주었는데. 사랑은 없어도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해주었는데. 가슴 아래 갈비뼈를 문질렀다. 속이 쓰렸다. 배가 고팠다. 교도소는 진짜 콩밥 주나, 요즘은 그렇지도 않다던데. 징벌은 하루면 족했다. 완전히 내 잘못도 아니었을뿐더러. 그 여자가 억지를 부리는 바람에 들어온 것이었다. 하룻밤 자고 나면 다시 보게 될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뒷골이 띵해졌다. 멍청한 건 질색이었다.
하필 동향이었는지. 아침햇살이 눈에 들이쳤다. 비타민 디가 들어간 영양제를 먹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시커먼 감방에서 맞이한 미라클 모닝이었다. 시멘트벽을 보며 눈을 몇 번 깜빡였을까. 교도관이 나를 불렀다. 이일사팔. 이일사팔. 적응되지 않는 이름이 아닐 수 없었다. 차라리 곤충 이름이 나을 것 같았다. 교도관은 문을 열었다. 철문이 틈을 만들고, 나는 꺼내어졌다. 나의 의지는 조금도 반영되지 않은 행위들이었다. 행선지도 모르는 채 따라 걸었다. 그녀는 여러 안내를 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정보 중 내게 중요한 사실은 하나였다. 산책 시간이니 밖으로 나간다는 것.
공터는 좁았다. 모래밭 구석에나 잔디와 나무가 조금씩 심겨 있었다. 푸르러 보이진 않았다. 시시티브이는 두 대. 사각지대는 거의 없어 보였다. 컨베이어 벨트 위 상품처럼 빙글빙글 도는 사람들. 철조망에 기대어 쭈그려 앉은 사람들. 그들 뒤로 그물모양 울타리가 두 겹으로 싸여있었고. 그 위에는 스프링을 닮은 가시철조망이 누워있었다. 새삼스럽지만 실감이 났다. 나갈 수 없구나. 교도소 전체를 두르고 있을 철조망은 온전히 막혀 있는 것보다 더 큰 위압감을 주었다. 도둑년들에게 인권이란 없어야 하는 게 맞았다. 인식은 생각보다 쉽게 무뎌지는 것이었다.
벤치에서 낄낄대는 사람들이 보였다. 몇 없는 벤치를 차지한 걸 보니 꽤 힘 있는 사람일 테다. 안면 터서 나쁠 건 없겠거니 싶었다. 저 사람들 틈바구니에 껴서 조금이나마 편하게 살아볼 생각이었다. 권력은 언제나 정보를 가지고 오니까. 나는 알아야 할 게 많았다. 도둑년들 사이에서 가만히 있다간 밟힐 게 자명했다. 불 보듯 뻔한 결과였다. 발길을 돌렸다. 아니 정확히는 돌리려고 했다. 뒷덜미가 잡힌 탓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3 상 6’ 왼쪽 가슴에 달린 명찰이 보였다. 같은 방 사람이었다. 뒷덜미를 잡은 건 어제 철창을 두드리며 교도관을 불렀던 단발머리의 젊은 여자였다. 그녀의 뒤로 삼 곱하기 육을 십칠로 아는 멍청한 여자와 허공을 보며 멍때리는 여자, 꾸벅꾸벅 조는 여자가 보였다. 하이. 짧은 인사를 건넸다. 고개를 푹 숙인 단발머리 젊은 여자만 손을 작게 흔들었다. 도둑년 주제에 수줍어하기는, 조소가 나왔다.
멍청한 여자는 말이 많았다. 네 뒷덜미 잡은 애는 에리시크톤, 쭈그려 앉아서 멍때리는 애는 공길이, 조는 애는 카나리아, 나는 패왕별희. 여기서는 이름으로 안 불러, 알아봐야 정만 들고 쓸모가 없거든. 이유도 묻지 마. 그냥 다 알게 돼. 너는? 마땅한 별명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름은 평범했다. 삶도 평탄했다. 별명을 부를 만큼 깊은 친구는 없었다. 결국. 누에나방. 또 그 곤충의 이름이었다. 그래 누에나방. 패왕별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자외선이 피부에 얼마나 안 좋은지, 여기서 파는 선크림은 구려서 바르면 뾰루지가 난다든지……, 그다지 쓸모 있는 말은 아니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끊어냈다. 여기 개구멍 같은 거 없나? 패왕별희의 눈이 흔들렸다. 정보를 떠올리기 위한 동공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눈부터 손, 어깨, 온몸까지 벌벌 떨기 시작했다. 에리시크톤이 패왕별희의 귀를 막았다.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던 패왕별희는 잘게 떨리는 입술을 손으로 막았다. 웅얼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구멍이 아냐, 구멍이 아냐, 구멍이 아냐. 나는 여자야. 여자로 태어났어. 남자가 아니야. 게이가 아니야. 나는 남자로 태어나서 아니, 아니 여자로 태어나서 남자가 아닌데, 게이가 아닌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댔다. 한참을 그러던 패왕별희는 눈을 뒤집으며 기절했다. 교도관들이 패왕별희를 의무실로 옮겼다. 다른 수감자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특별한 일이 아닌 것 같았다. 별 미친년이 다 있네. 손가락을 하나씩 쥐었다 폈다. 엄지, 검지, 중지, 약지, 소지. 다섯, 열, 열다섯. 주먹을 꽉 쥐었다. 햇볕이 뜨거웠다. 이마를 팔뚝으로 닦아냈다. 땀이 흥건했다.
패왕별희는 남자처럼 살았다. 아니 남자를 강요당했다. 게이 할아버지에게 팔려 간 그녀는 평소에 가슴을 옥죄고 남자의 생식기가 달린 팬티를 입었다. 할배는 섹스할 때 진짜 가슴과 가짜 음경이 흔들리는 모습을 사랑한다고 했다. 가짜 고추는 많은데, 가슴은 티가 난댔다. 게이인 그가 그녀를 구매한 이유였다. 젖과 좆이 좋아. 패왕별희는 사랑이 뭔지도 모르면서 나부낄 뿐이었다. 가슴을 옥죄던 붕대는 남자의 목에 감겨있었다.
똥구멍을 팔아 번 돈은 쏠쏠했다. 못 배워먹은 탓에 죄악감도 모르고 살았다. 그녀는 십오 년을 그처럼 살았다. 누군가의 탄생에서부터 교복을 입은 학생이 될 때까지의 시간은 변태의 구멍으로 산 세월이었다. 스물여섯을 지나던 어느 날. 서재에서 새로운 교성이 들려왔다.
3 상 6방. 패왕별희는 없었다. 배가 고팠다. 하는 것도 별로 없는데, 배는 자꾸만 고파왔다. 빈자리를 애써 채워야 하는 것처럼 그랬다. 에리시크톤은 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불안한지 손가락을 바닥에 두드렸다. 쟨 또 왜 저래. 누군가에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카나리아는 여전히 졸고 있었고, 공길이는 다리를 찢고 있었다. 에리시크톤이 패왕별희를 기다리는 줄 알았다. 방 한복판에 펼쳐놓은 밥상과 초록색 수저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소지가 배식을 시작하자, 에리시크톤은 배식구 앞에 앉았다. 카나리아가 하품하며 일어났다. 저기 언니, 같이 좀 말립시다. 나는 엉거주춤 일어났다. 누가 봐도 저쪽이 연상 같았다. 카나리아는 에리시크톤의 오른쪽 어깨를 붙잡았고 나는 눈치껏 반대쪽 어깨를 잡았다. 카나리아가 눈짓했다. 하나 둘 셋. 뒤로 질질 끌린 에리시크톤은 몸통을 비틀며 버둥거렸다.
에리시크톤은 뭐든 잘 먹었다. 맛이 있든 없든 음식이라면 일단 입에 쑤셔 넣고 보았다. 음식을 먹기 시작하면 주변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크게 다투던 날도 그랬다. 그녀는 치킨을 먹고 있었다.
공길이는 자연스럽게 음식을 받아 밥상 위에 올렸다. 군더더기 없는 일련의 과정이 자연스러웠다. 카나리아는 이제 됐다는 듯 자리에 가서 앉았다. 까딱했다가는 얘가 배식구에서 다 처먹거든요, 언니도 얼른 먹어요. 배고플 텐데. 쌀밥과 김치, 돈가스, 콘샐러드, 된장국으로 이루어진 식단이었다. 도둑년들도 균형 잡힌 세 끼를 먹여주는구나. 단출한 감상과 함께 숟가락을 들었다. 돈가스를 집어 이로 끊는데, 에리시크톤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허겁지겁 숟가락을 입으로 퍼 날랐다. 밥과 국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입술을 모으고 볼을 크게 움직이며 씹던 에리시크톤은 돈가스 두 개를 젓가락으로 찍어 입으로 넣었다. 밥과 국을 삼키지 않은 채였다. 커다란 김치를 찢지도 않고 우악스레 집어넣는 모습이 기괴했다. 우적우적, 빠르고 또 기계적으로 음식을 씹고 있었다. 에리시크톤은 저작운동을 멈추지 않으면서 몸을 벌벌 떨었다. 추워 보이지는 않았다. 공길이와 카나리아는 익숙하다는 듯 김치가 좀 쉰 것 같지 않으냐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에리시크톤은 음식으로 가득 찬 볼을 움직일 뿐이었다. 별 미친년들이 다 있네. 숟가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교도소의 주식은 콩밥이 아니었고, 돈가스는 맛이 없었다.
방문이 청테이프로 마감되고 있다. 닭 다리의 튀김옷과 촉촉한 육질이 뜯어진다. 가스버너 위에 연탄이 올라간다. 치킨 무를 집어 입에 던져 넣는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손을 잡는다. 닭 날개를 집어 든다. 소화에서 점화로 돌아간 손잡이가 있다. 닭 뼈가 하나둘 쌓인다. 파열음이 터진다. 탄산음료의 거품이 여린입천장을 때린다. 일산화탄소가 코와 입으로 들어간다. 닭의 가슴살이 죽죽 찢어진다. 누인 머리가 돌아가고 환상이 펼쳐진다. 튀김옷이 부수어진다. 폐가 짓이기는 고통이 이어진다. 머스터드를 바른 튀김옷이 게 눈 감추듯 사라진다. 주름진 얼굴에는 눈물길이 난다. 후레자식. 치킨은 맛있었다. 하나가 먹다 둘이 죽어도 모를 맛이었다.
투 엑스라지의 죄수복은 단추가 하나 없었다. 자살 방조죄. 에리시크톤의 다른 이름이었다.
패왕별희가 돌아왔다. 그녀는 벽에 기대어 앉았다. 결 좋은 파마머리를 손 빗질하며 능청을 떨었다. 의무실 침대가 푹신해서 오랜만에 잘 잤다는 둥, 밥은 맛있었냐는 둥. 여전히 입은 쉴 줄을 몰랐다. 카나리아는 다시 자는 중이었고, 공길이와 에리시크톤은 책을 읽었다. 성경책 그리고 불경이 나란히 쥐어져 있었다. 종교 대통합의 현장이었다. 조그만 방 안에서 패왕별희의 말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듣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었다. 머리가 울렸다. 뒤통수를 누군가 쥐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참았던 말이 터져 나왔다. 야, 너 좀 닥쳐. 닥쳐도 돼. 그러니까 입 다물어. 고요해졌다. 전자기기가 없으니 생활 소음마저 없었다. 패왕별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평화로웠다. 나는 바닥에 팔을 베고 누웠다. 허리가 욱신거리게 아파져 왔다. 인간으로서 값싸지는 기분이 들었다. 무료했다. 처벌이란 이런 건가. 여기는 교도소인데, 형무소가 아닌데. 형무소와 교도소는 목적부터 같지 않았다. 죄인에게 닿는 처벌의 범위가 달랐다. 형무소는 처벌의 목적을 그저 죗값을 치르는 데에 집중했다면, 교도소는 개도에 주목했다. 인권의 성장은 단어의 교체로 나타났다. 적어도 내 안에서는 그랬다. 나는 여기서 과연 무얼 깨우칠 수 있을까. 이끎 당할 수 있을까. 가물가물 눈이 감겼다. 화장실의 허술한 몰딩이 보였다. 균열이 있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조그만 틈새가 보이는 것도 같은데. 비타민 디는 수면을 도왔다.
패왕별희는 그러려니 했다. 처음에만 그랬다. 새로운 구멍이구나. 내 구멍, 쟤 구멍, 또 구멍. 쟤가 오면 나는 어떡해. 버려지는 거야. 안 돼. 패왕별희는 코냑 병 하나를 들었다. 서재로 가 할배의 머리통을 깨부술 생각이었다. 네가 뭔데 날 버려. 늙어 먹은 주제에. 고추도 작은 주제에. 못생긴 주제에. 서재의 문이 열렸고, 술병의 엉덩이가 머리통을 강타했다. 흰 머리카락이 붉게 젖었다. 달큰한 포도 향이 짙어졌다. 남성기 팬티를 입은 교성의 주인은 소리를 지르며 도망갔다. 패왕별희는 살인 미수가 됐다. 남자는 머리통만 다쳤으면서 법원에 휠체어를 끌고 왔다. 선글라스는 톰 포드 제품이었다. 법정에 선 패왕별희를 노려보는 할배는 왼손을 들어 올렸다. 검지와 엄지를 떼었다 붙였다 반복했다. 둥근 원 사이로 백태 낀 혀를 날름거리던 그는 두 음절을 뱉었다. 구멍. 판사 망치가 세 번 부딪혔다. 살인 미수 그리고 사기범, 12년형. 패왕별희의 새로운 이름이 불리고 있었다.
교도소는 온수가 귀했다. 수도꼭지만 돌린다고 나오는 게 아니었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찬물만 죽죽 나왔다. 엄연히 사회와 분리된 곳이었으니까. 당연한 처사였다. 도둑년들에게 따스함은 사치였다. 비누를 문질러 거품을 냈다. 싸구려 라벤더 향이 나는 염기성 덩어리를 온몸에 미끄러뜨렸다. 찬물이 흘렀다.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수구 사이로 말간 거품이 흘러들었다. 수건으로 머리를 툭툭 털고 있는데, 등을 보인 여자 옆에서 어깨를 주무르는 패왕별희가 보였다. 여자는 인상을 찌푸리고 귀를 후볐다. 그녀의 등판에는 대한민국 전도를 닮은 호랑이가 누워있었다. 색색의 잉크를 삽입한 살덩이가 무섭지도 않은지. 패왕별희는 제 요구사항을 말하고 있었다.
“언니 나 눈썹 칼 한 번만 구해다 줘. 내가 누구 찌르겠대? 내 눈썹 좀 봐. 대림에서 타이 마사지하던 애가 출소하고 다듬지도 못했어. 시커먼 고추들이 쓰는 전기면도기로 밀 수도 없고. 예쁜 내 눈썹 불쌍해서 어떡하면 좋아.”
“아해야, 닥쳐봐라. 안되는 거 알면서 왜 그런디야. 참말로.”
여자는 패왕별희의 말을 들으며 윗옷을 걸쳤다. 그녀의 배꼽 아래로 아치형의 흉터가 보였다. 하루살이 언니―, 하고 말꼬리를 늘이며 애살맞게 굴던 패왕별희가 나를 올려보았다. 누에나방에서 하루살이, 하루살이에서 누에나방.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던 그녀는 귓속말을 전했다. 우리 방 누에나방이야. 애가 좀 이상해. ‘하루살이’라고 불리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눈 다음엔 붉은 명찰을 보았다. 장기복역수라는 의미였다. 벤치에 앉아있었던 얼굴이었다. 하루살이는 입꼬리를 양옆으로 치켜올렸다. 볼살이 차오르면서 광대뼈가 툭 불거졌다. 영락없이 호방한 아주머니의 얼굴이었다.
“원하는 거라도 있는감? 술, 뽕, 칼 빼고 다 되는데.”
패왕별희를 흘깃 쳐다보았다. 그녀는 또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시작한 참이었다.
“개구멍의 위치. 아니면 개구멍이 될 수 있을 만한 곳을 알고 싶은데요.”
원하는 바를 빠르게 말했다. 조급했다. 하루살이는 내 눈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짙은 갈색의 눈동자는 속내를 들여다보려 하고 있었다. 새카만 눈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갈색 홍채에 담긴 조그만 동공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게 보였다. 짧은 숨을 뱉어낸 하루살이는 양손을 몇 번 비볐다. 손을 씻을 때의 동작과 닮아있었다.
“아기 엄마. 방을 잘 봐봐요.”
바지를 추켜올린 그녀는 내 어깨를 두드리고 샤워실을 나갔다. 증기를 품은 축축함이 몰려왔다. 담긴 게 없을 줄 알았는데, 들켜버렸다.
정혈이 시작되었다. 가지고 있던 생리대는 없었다. 변기통 위 작은 바구니에 생리대가 보였다. 일단 빌리고 갚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실제로 갚을 일은 없을 테지만. 아무리 도둑년들이라도 생리대로 생색을 낼 일은 없을 것이다. 생리대가 있다는 안정감이 들자 고통이 심해졌다. 애초에 포궁을 들어냈어야 하는 건데. 고통을 닮은 모난 말이 튀어나왔다. 출산하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태명 따위 지어주지 않았던 세포는 삼십팔 주가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어쩌면 알았는지도 모른다. 창조주로부터 시작되고 끝날 운명을, 창대하지 못할 마지막을. 말랑하고 한없이 보드랍던 살결이 감기고, 목에 붉은 줄이 그어지던 그때. 그날도 배가 아팠었다.
비관적인 생각은 끝을 몰랐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턱을 치켜들고 내 시야에서 가장 높은 곳을 쳐다보았다. 천장이 낮아 범위의 변화는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조금 숨이 트이는 것도 같았다. 화장실 천장은 낡아 있었다. 구석에는 곰팡이가 핀 것도 같았다. 시커먼 그것을 자세히 보려 눈을 찌푸렸다. 단순한 미생물이 아니었다. 화장실의 몰딩과 이어지는 벽엔 틈이 있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균열까지 포함하면 성인 여성의 두 뼘쯤 될까 싶은 너비였다. 어느 물리학자의 혁신적인 발언 하나가 떠올랐다. 벅차올랐다. 주먹 쥔 손에는 힘이 들어가고 입술을 안으로 감쳐물었다. 고양감을 감추기 어려웠다. 불시에 불쾌한 감각이 엉덩이를 감돌았다. 변비를 동반한 월경은 발견도 무력하게 만들었다.
감방은 불을 꺼주지 않았다. 불상사를 막기 위함이었다. 일정 수준의 빛은 수면을 돕는다고 했다. 핑계는 좋았으나 형광등은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썩 달갑지 않다는 뜻이었다.
“다들 여기서 얼마나 살아야 해.”
나는 처음으로 말꼬를 텄다. 오랜만에 말을 해서인지 입술의 감각을 잃은 것 같았다. 양 손가락을 펴서 계산하는 패왕별희와 인중을 긁으며 고민하는 에리시크톤이 보였다. 공길이와 카나리아는 잠든 듯했다. 십이 년, 열여덟 년, 팔 년. 셋이 합쳐 삽십팔 년이었다. 아득했다. 이 인생을 한 번 더 살고도 십 년쯤 남은 정도였다. 화장실의 모서리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저 미약한 균열을 믿기로 했다. 가느다란 명줄처럼 불확실한 미래를 상상하기로 했다.
“우리 나가자.”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카나리아가 이를 가는 소리만 들려왔다. 아직은 코를 골지 않는 것 같았다. 나가면 뭐 할 건데, 패왕별희가 속삭이듯 물었다.
“놓고 온 것이 있어.”
내가 답했다. 패왕별희는 그게 뭔지 물어보고 싶은 눈치였다. 굳이 그녀의 궁금증에 응답해줄 생각은 없었다. 사실 나도 확신할 수 없었다. 내가 사회에 놓고 온 게 실재적인 물건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손가락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나는 치킨 먹고 싶어.”
에리시크톤이 말했다. 혀를 차던 패왕별희는 철문을 향해 돌아누웠다. 에리시크톤이 손가락으로 패왕별희를 찔러댔다.
“언니는 뭐 하고 싶어?”
“……탕, 여탕에 갈 거야. 가짜 고추 달고 산 세월이 길어서. 내가 여자인 게 가끔은 실감이 안 나.”
부직포 재질의 얇은 이불이 바스락대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말없이 같은 생각을 했다. 카나리아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교도소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규칙적이다. 일어나고, 밥을 먹고, 시간을 죽이고, 사람 죽인 이야기도 하고. 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도 있었다. 에리시크톤이 그랬다. 그녀는 어리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출소했을 때는 어리지 않을 테지만. 에리시크톤은 한경테셋 책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볼펜 꽁무니로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날 교도소에 넣은 그 애가 생각이 났다.
남자애는 아마 정의감에 불탔을 것이다. 목이 거멓게 변색한 아이의 시체처리를 고민할 때 전화가 왔었다. 그 애는 아이가 보고 싶다고 했다. 내 안에서 길러낸 세포를 궁금해했다. 손이 떨려왔다. 3분이면 완성되는 미역국의 비린내가 싫어 물만 마신 탓이었다. 집으로 와.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 도착했다. 흰 포대기에 싸인 사람이었던 것을 보여주었다.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뛰쳐나간 걔는 마당 구석에서 맑은 위액을 뱉어냈다. 등을 두들기며 일반쓰레기 통에 버릴지, 집 마당에 묻어버릴지 물어보았다. 남자애는 미친년, 이라는 말만 뱉고 뛰듯이 마당을 벗어났다. 경찰들이 들이닥친 건 두 시간 후의 일이었다.
내가 교도소에서 늙어갈 동안 그 애는 미국에서 바퀴벌레 연구를 진행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학구열이 높았으니까. 명치께가 뜨끈해졌다. 눈을 감고 손가락을 하나하나 폈다가 접었다. 짧은 숨을 내쉬며 눈을 떴을 때 방을 점검한다며 교도관들이 들이닥쳤다. 손 머리 위로 올리고 복도에 서십시오. 다른 수감자들도 놀란 눈치였다. 그들은 방을 뒤엎고 위험한 물품이 있는지 찾아내고 있었다. 술, 뽕, 칼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으리라며 안심을 하던 차였다. 눈썹 칼이 나왔다는 보안의 말이 들렸다. 공길이의 성경책에서였다. 그녀는 웅성대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끌려갔다. 오히려 관심을 받으니 좋아하는 것도 같았다. 양옆을 둘러보았다. 오른편에 선 카나리아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썩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그 옆 에리시크톤은 눈을 내리깐 채 발가락을 꼼질댔다. 패왕별희를 돌아보자 그녀가 날 보며 웃었다. 패왕별희는 엄지와 검지로 고리를 만들어 입술 위를 길게 그었다. 야 너 좀 닥쳐. 닥쳐야만 해. 손버릇이 나쁜 그녀의 복수였다.
누에나방은 겁이 많았다. 그래서 항상 주먹을 꽉 쥔 채 걸었다. 때때로 누군가를 칠 기세라며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누에나방은 개의치 않았다. 타인에게 위협이 되는 일마냥 보이는 건 나에게 위협이 가해지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누에나방이 곤충을 맨손으로 잡는 괴물이라며 놀림을 받았던 어느 날도 그랬다. 어린애는 주먹만 세게 쥘 뿐이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말했다. 도망가고 싶을 때마다 손에 힘을 풀고 숫자를 세. 하나- 둘- 셋- 넷- 다섯. 차례로 엄지, 검지, 중지, 약지, 소지가 펴졌다. 그리곤 다시 접어. 다시 여섯- 일곱-……. 마흔이 넘어갈 때쯤 그녀의 주먹 쥔 손이 풀려갔다.
“낳지 말 걸 그랬어.”
누에나방의 어머니가 울고 있었다. 그녀는 전화기를 쥔 손으로 얼굴을 문질러 닦았다. 화장이 번지고 뭉개어졌다. 누에나방은 조용히 방문을 닫고, 알약을 삼켰다. 또다시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눈을 감고 손가락을 폈다. 하나-나는 둘-절대 셋-낳지 말 걸 그랬어 넷-라고 다섯-하지 여섯-말아야지 일곱-절대로 여덟-…….
“낳지 말 걸 그랬어.”
포대기에 싸인 신생아는 변사체가 되었다. 산후조리를 하지 않아 벌벌 떨리는 손은 다시 힘이 들어갔고, 풀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피고석에 앉은 누에나방은 손을 펴고 무릎에 얹었다. 쓸어내리는 바지의 결이 버석했다. 아동복지법, 아동수당 법, 영유아보육법 위반 그리고 살인 혐의. 누에나방에게 붙은 죄명이었다. 방청석에 앉은 다른 누에나방이 보였다. 그는 입을 다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어머니는 어디에도 없었다.
셋은 아주 느리게 화장실로 기었다. 화장실 문은 진작 열어두었고, 카나리아는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다. 미리 가져다 두었던 책을 쌓아 밟았다. 발아래 불경이 밟혔다. 죄를 짓는 기분에 괜히 나무아미타불을 속으로 읊었다. 극락왕생은 바라지도 않았다. 팔을 뻗으면 화장실의 천장이 빠듯하게 닿았다. 손톱이 겨우 들어갈 법한 틈새의 모서리를 눌러보자, 눅눅함이 느껴졌다. 화장실의 습기 때문이었다. 아마 이 벽만 뚫으면 개구멍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었다. 우리는 치실과 플라스틱 숟가락으로 사이를 긁었다. 물론 여기서 우리란 에리시크톤과 나뿐이었다. 패왕별희는 구멍을 보니 토가 쏠린다며 변기를 잡고 욱욱대고 있었다. 교도관이 졸고 있기를 바랐다. 치실로, 숟가락으로 긁어대던 틈이 뚫렸다. 진정한 구멍이 생기자 그 주변은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파편을 모아 여러 겹 쌓고 두꺼운 부직포 담요 위로 던졌다. 비로소 공간이었다. 길이었다. 너비 사십 센티미터쯤 될 법한 타원형 구멍 사이로 손을 넣었다. 택배 상자의 내부를 훑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 느껴졌다. 손에 입자 굵은 가루가 묻은 듯 건조한 소리가 났다.
스읍, 에리시크톤은 침을 혀로 말아 감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꺾었다. 좀 힘들겠는데? 탈출구에서 손을 몇 번 휘젓던 그녀는 제 허리를 한 뼘 두 뼘 재기 시작했다. 패왕별희는 눈을 감고 구멍이 아냐, 구멍이 아냐, 구멍이 나야, 구멍이 아냐, 뇌까리고 있었다. 이 구멍의 끝에서 하늘로 솟을 수 있을지, 여기보다 더 꺼질지 그 누구도 몰랐다. 나의 손은 무언가를 쥐고 있는 듯 묵직하게 떨렸다. 다섯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가 접을 뿐이었다. 엄지, 검지, 중지, 약지, 소지 그리고 소지, 약지, 중지, 검지, 엄지. 주먹에서 보자기로 다시 보자기에서 주먹이 되길 몇 번 반복했을까. 손에 힘이 풀렸다. 나는 무엇을 놓고 왔지. 눈을 감고 제대로 떠올리려 했다. 알 수 없었다. 잊어버렸다. 정말 까마득한 기억 저편에는 있을 법도 한데. 너무 막연해서 닿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나갈 이유를 잃어버린 살인범과 몸이 커서 나갈 수 없는 패륜아, 기절해버린 사기범이 있었다. 카나리아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손을 낳고 자손을 죽여버린 누에나방. 누에고치를 닮았던 생명을 앗아버린 엄마, 창조주, 누에나방. 나는 죽어가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가 남아있었다. 입술이 열리지 않았다. 원래부터 없던 것처럼, 흔적만이 남아있었다. 애초에 살인범에게 아사라는 선택지는 없었다. 범죄자에게 남은 건 형량이지, 사정을 말할 수 있는 입이 아니었다.
여자들은 용감했다. 그리고 도둑년들은 겁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