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창밖의 환한 빛, 박가연

창밖의 환한 빛

  나는 조금 전 휴게소에서 산 와우 껌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반으로 껌을 찢으니 단 향이 피어올라 왔다. 침이 고였다. 옆자리에 앉은 해리에게 껌 반쪽을 내밀었다. 해리가 껌을 받았다. 나는 해리가 입에 껌을 넣는 걸 보고 껌 껍질을 깠다. 껌이 입에서 침이랑 섞였다. 다디단 소다 맛이 났다. 찐듯하게 단맛에 턱이 아렸다. 나는 껌을 씹다가 버스 천장에 있는 시계를 보았다. 벌써 밤 열 시가 넘어갔다. 버스의 열린 문으로 기사가 들어왔다. 그는 버스 통로를 걸으면서 승객을 세었다. 기사는 손가락을 접으면서 사람을 셌다. 우리가 앉은 좌석으로 다가오자 내 옆에 앉은 해리는 세지 않았다. 버스 기사도 해리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해리가 씹던 껌이 푹 하는 소리를 내며 터졌다. 기사는 운전석으로 돌아가 시동을 걸었다. 나는 고갤 다시 돌려 해리를 바라보았다. 해리에겐 죽은 사람에게 나던 냄새가 나지 않았다. 대신 원래 해리에게 나던 익숙한 냄새가 났다. 그건 따뜻한 볕에 이불을 말린 냄새였다. 아직 해리가 숨이 붙어 있나. 그 순간 해리가 불고 있던 껌이 다시금 터졌다. 해리와 눈이 마주쳤다.
  “뭘 그리 봐. 닳겠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휴게소에서 잠시 정차했던 시외버스가 다시 출발했다. 다시 고속도로를 달리니 멀미도 스멀스멀 올라왔다.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움직이는 산 능선을 보자 며칠 전 해리에게 마지막으로 전화가 왔던 밤을 떠올랐다. 그때 나는 몹시 배가 고팠다. 살은 하루가 다르게 쪘는데 허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로 해리는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해리는 오늘은 말하지 못한다면서 말을 아꼈다. 해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았다. 나는 얼마 전에 결혼한 해리에게 그저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며칠 뒤 다시 온 연락은 부고 문자였다. 장례식은 옥주에서 한다고 적혀 있었다. 왜 신혼집을 꾸린 대전이 아닌 고향인 옥주인지를 생각하다가 나지막하게 옥주를 발음해보았다. 옥주를 말할 때면 입술이 동그랗게 모여졌다. 그때마다 나는 노랗고 동그란 옥수수 알맹이가 떠올랐다. 실제로 옥주는 옥수수가 유명한 동네였다. 해리네 과수원에서도 늘 옥수수가 있던 기억이 났다. 나는 메시지에 있는 해리의 영정 사진을 바라보았다. 고등학교 졸업 사진으로 찍었던 사진이라 영정사진 속 해리가 앳되었다. 해리는 스물이 조금 넘어서 혼인신고를 했다.
  버스의 급브레이크에 몸이 앞으로 쏠렸다. 나는 손잡이를 잡고 해리를 보았다. 해리가 불고 있던 풍선껌이 또 터져버렸다. 버스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나아갔고 해리는 다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얘는 아무렇지도 않나. 혼자 중얼거렸다. 눈을 감은 해리를 바라보았다. 못 본 사이에 볼이 수척해 보였다. 그새 해리는 옅게 코까지 골면서 잠들었다. 다시 창밖을 보았다. 옥주까지 도착하려면 앞으로도 두 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나는 눈가를 비비려다가 가방에서 작은 거울을 꺼냈다. 볼살이 며칠 전보다 더 오른 것 같았다. 급격히 살이 찐 뒤로 거울을 보지 않게 되었다. 나는 오랜만에 고향에 가지만 장례식장만 들렸다 내일 아침 첫차로 타고 다시 돌아오기로 마음먹었다. 곤히 잠든 해리의 고른 숨소리를 듣고 있으니까 졸음이 밀려왔다.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얼핏 선잠이 들었다. 해리와 같이 갔던 군산이 꿈에 나왔다. 그때 군산으로 가는 버스에서 해리는 품에 보온병을 품고 졸았다. 보온병을 안기보다는 품고 있는 게 더 맞았다. 해리는 집에서부터 족히 일 리터는 되어 보이는 보온병을 가지고 왔다.
  “이따 바다 가서 마시자.”
  해리는 긴 패딩의 지퍼를 내려 보온병을 보여주며 말했다. 해리는 보온병이 무겁지도 않은지 들고 흔들었다. 나는 해리를 바라보다가 패딩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무언가가 잡혔다. 껌이었다. 나는 껌을 반으로 찢었다. 반쪽 껌을 든 손으로 해리를 툭 쳤다. 해리는 나를 한 번 흘깃 보더니 껌을 받았다. 우리는 소다 맛이 희미하게 나는 껌을 나눠 씹으며 군산으로 가는 버스에 탔다.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히터 바람이 느껴졌다. 롱패딩을 벗어서 허벅지에 덮었다. 해리도 얼마 가지 않아서 보온병을 안은 채로 졸았다.
  그사이 버스는 첫 번째 경유지에 닿았다. 몇 사람이 내렸다. 기사가 룸미러를 흘끗 보더니 자동문을 닫았다. 해리는 어깨를 뒤척이며 단잠에 빠져 있었다. 버스에 남은 승객은 우리밖에 없었다. 나는 버스의 커튼을 더 젖혔다. 창밖 너머 까만 산을 바라보았다. 먼 곳을 바라봐야 멀미를 참을 수 있었다. 언젠가 해리는 차만 타면 졸음이 몰려온다고 말했다. 아마 군산으로 가는 길에 한 말 같았다. 우리는 군산 터미널에서 도착해 화장실에 들어갔다. 해리는 화장실에 들어가 세면대에 보온병을 올려두었다. 아무래도 보온병이 무거운 모양이었다. 우리는 터미널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았다. 새벽 다섯 시도 안 된 겨울은 여전히 어두웠다. 히터 바람에 자꾸 눈이 감기던 참이었다.
  “세경아.”
  나는 졸음을 참고 해리를 보았다. 해리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해리의 허벅지에 둔 핸드폰 액정에서는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따 무슨 소원 빌 거냐고.”
  나는 해리의 말을 듣고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소원이 있었던가. 그때 나는 별 소원이 없었다. 그동안 가고 싶었던 서울권 대학교에도 무난하게 합격한 참이었다. 기숙사 추첨제에서도 당첨되어서 조만간 옥주의 집을 정리하고 올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차창 너머 신호등의 적색등이 깜빡이고 있었다. 내 유일한 소원이라면 다시는 고향에 얼씬도 안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해리의 허벅지에 있던 핸드폰 액정은 빛이 어두워졌다가 이내 꺼져버렸다. 아무리 가도 바다가 보일 기미는 없었다.
  “그럼 너는 무슨 소원 빌 건데?”
  해리의 눈썹이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의도치 않는 내 물음에 놀란 기색을 보였다. 그때 해리는 집 밖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안방 전등이 꺼지고 나서야 들어갔다. 나는 해리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먼저 물어보기 껄끄러워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그 순간 해리가 내 손을 잡았다.
  “세경아 없어졌어.”
  “뭐가? 뭐가 없어졌는데?”
  해리의 표정이 울상이었다. 해리가 집에서부터 안고 온 보온병이 사라졌던 것이었다. 유리창으로 비응도가 적힌 간판이 보였다.
  “돌아갈까?”
  나는 해리가 잡은 손을 세게 쥐면서 물었다. 해리는 고개를 저었다. 택시가 멈췄다. 기사는 여기가 비응도 근처라고 말해주었다. 우리는 일단 택시비를 내고 내렸다. 먼저 걸어가는 해리는 고개를 떨군 채 걸어가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나는 롱패딩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리고 해리의 뒤를 따라갔다. 바닷가 근처 바람은 산속 바람보다 찼다. 나는 고작 보온병인데 얘는 왜 이리 기가 죽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알 수 없는 마음을 뒤로하고 중요한 것이었으면 말 좀 하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해리가 멈췄다. 뒤를 돌아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별건 아닌데 주고 싶은 게 있었어.”
  나도 덩달아 발걸음을 멈췄다. 해리는 근처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나도 편의점으로 쫄래쫄래 따라갔다. 해리는 가판대에서 인스턴스 미역국을 골랐다. 계산하고 미역국이 담긴 용기의 비닐을 뜯었다. 온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미역국이 담긴 용기에 붓고 편의점에서 나왔다. 해리는 미역국을 나에게 건넸다.
  “서울 가서도 잘 지내라고.”
  보온병에는 미역국이 들어있었다고 해리가 전해주었다. 어젯밤부터 끓인 미역국이었다고. 나는 두말없이 미역국을 받아마셨다. 국물은 뜨겁고 달았다. 그동안 허기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용기째 들이켰다.
  “맛있어?”
  “진짜 맛있어.”
  해리가 웃어 보였다. 그 근처에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을 귀신들이 우리 옆으로 다가왔다. 나는 예전부터 종종 다양한 형체를 보았다. 고등학생 무렵에는 세상을 뜬 할머니가 보였다. 죽은 할머니가 부엌에서 분주히 움직이며 쌀을 씻었다. 할머니는 가스레인지 근처를 왔다 갔다 하며 된장국을 끓였다. 이런 나를 할머니는 눈치채고 있었는지 가스 불을 끄고 다가왔다. 할머니는 앞치마를 벗으며 말했다.
  “네가 한 거야.”
  할머니는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다듬고 대문 밖으로 나갔다. 며칠 뒤 할머니는 다시 대문을 열고 들어와 앞치마를 꺼내 입었다. 할머니는 냄비 뚜껑을 열어 된장국을 보고 쌀을 씻었다. 삼 년이 넘게 일하러 나간 아빠를 대신해 할머니는 냉장고에 밑반찬을 채워놓았고 햇빛 좋은 날에는 이불도 빨아서 마당에 말렸다. 다시 부엌으로 들어간 할머니는 밥솥에 쌀을 안쳤다. 할머니는 또다시 거울을 보고 정리한 다음 밖으로 나갔다. 나는 대문을 나서는 할머니를 몰래 따라갔다. 대문을 나섰는데 할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는 그림자 하나 남기지 않고 떠나가 버렸다. 나는 할머니가 사라진 골목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오기를 바라며 오랫동안 골목 끝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할머니는 노을이 질 무렵에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오래 서 있으니 다리가 아프고 허기가 졌다. 세상이 빙빙 돌 것 같을 때서야 다시 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해가 저물어서 거실은 어두워져 있었다. 부엌으로 들어갔다. 밥솥에는 아까 할머니가 안친 밥이 다 되어있었다. 나는 주걱을 들고 밥솥을 열었다. 뜨거운 흰 김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할머니가 살아있을 적 그랬던 것처럼 다 된 밥을 뒤섞었다. 내가 지은 밥과 달리 할머니가 안친 밥은 이상하게 맛있었다. 나는 물 조절에 자주 실패해 죽이 되거나 설익은 밥이 되곤 했다. 아무도 밥을 안칠 때 물을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나는 밥솥에 서서 밥을 주걱으로 퍼 입김으로 호호 식히면서 먹었다. 밥알이 뜨거워서 나는 뜨겁다, 뜨겁다, 하면서 밥을 삼켰다. 나는 보리와 현미가 섞인 통통한 쌀 알갱이에서 단맛이 난다는 사실은 그때 처음 깨달았다.
  그때도 할머니가 아닌 전혀 일면식이 없는 사람들도 나를 찾아왔다. 그림자가 없는 사람들은 어딘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나는 머뭇거리는 그들에게 무슨 말이 있느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선뜻 묻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들이 보여도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 그들이 나에게 말을 걸려고 하면 이어폰을 귀에 꽂아버렸다. 이어폰 속 음악에도 죽은 그들의 숨결에서는 바람 냄새는 감춰지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음악 소리를 더 높게 올리며 그들이 강을 건널 때 강바람을 맞아서 그런가 보다, 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나는 그들을 비켜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외면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냄새는 희미해지지 않았다. 멀리 일하러 나갔다던 아빠는 금방이라도 돌아올 것 같았지만 몇 년째 소식이 없었다. 나는 사람을 체취로 죽었는지 살았는지 분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비응도는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집에 나설 때처럼 빈속이었다면 몹시 추웠을 테지만 해리가 준 미역국을 마시니 버틸 만했다. 그동안 여태 잊고 있었던 힘이 느껴졌다. 해리가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다음에는 내가 미역국 끓여줄게.”
  나는 해리와 팔짱을 낀 팔에 힘을 주었다. 우리는 해수욕장 쪽으로 발길을 틀었다. 배도 든든하니 바람이 불어도 견딜 만했다. 모래사장에는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 바다 건너 수평선엔 해가 조금씩 뜨고 있었다. 거짓말처럼 세상이 조금씩 환해지고 있었다. 어디선 풍물놀이를 하는 소리가 들렸고 떡국을 나눠주고 있었다. 나는 해리를 바라보았다. 해리는 장갑을 낀 손을 모아 소원을 빌고 있었다. 나도 눈을 감고 손을 모았다. 해리가 집으로 돌아가면 잠을 푹 잘 수 있기를 바랐다. 그게 내 소원이라면 소원이었다. 소원을 다 빌고 눈을 떴다. 해리도 눈을 떴다. 해리가 무슨 소원을 빌었을지 궁금했다.
  “무슨 소원인데 이리 오랫동안 빌었어?”
  해리가 나를 보고 싱긋 웃었다.
  “비밀이야.”
  해리가 빈 소원이 궁금했지만 아무리 물어봐도 알려주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해리의 손을 잡고 떡국을 받으러 갔다. 떡국을 받으러 간 줄에 서면서 해리를 바라보았다. 해리가 숨을 내쉴 때마다 흰 김이 피어올랐고 한 해를 시작하는 예감이 좋았다.
  버스에서 안내 음성이 나왔다. 종점에 도착했다는 방송이었다. 나는 깜빡 잠이 들었다. 눈을 끔뻑거리며 창밖을 보았다. 창문 너머로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옥주였다. 아직 입에 껌이 있었다. 껌은 단물이 다 빠져 딴딴해졌다. 우리는 짐을 챙겨서 버스에서 내렸다. 자정이 가까워진 세상은 아까보다 더 고요했다. 공용 버스터미널에는 매표소 직원만이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나는 뒤돌아보았다. 티브이도 꺼진 캄캄한 터미널은 날이 밝을 때까지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세경아.”
  해리는 유리문을 잡고 손을 흔들었다. 해리에게 뛰어갔다. 터미널 밖 공기는 차가웠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이 보였다. 별은 우수수하고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나는 입을 모아 숨을 쉬었다. 흰 김이 피어올라 왔다. 해리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옥주는 여전히 공기가 맑고 차가웠다.
  “여전히 하늘이 맑네.”
  “여전히 여긴 살 시리게 추워.”
  나는 고개를 돌려 해리를 바라보았다. 해리는 목도리를 여미고 있었다. 내가 숨을 내쉴 때마다 흰 김이 아른거리며 보였다. 하지만 해리는 움직일 때 김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추우니까 우리가 여기서 벗어나려고 그렇게 발버둥을 쳤지.”
  해리에게 중얼거리며 나는 주름이 진 코트의 어깨를 털었다. 우리는 장례식장을 향해 걸어갔다. 해리는 나보다 한 발자국 일찍이 걸어갔다. 바람이 불었다. 목덜미에 스치는 바람이 차가웠다. 바람에선 겨울 냄새가 묻어났다. 나는 손바닥으로 목을 훔쳤다. 먼저 걸어가는 해리의 곁으로 낯선 사람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해리에게 말거는 것 같기도 하고 같이 걸었다가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나는 놀라서 해리를 불렀다. 해리가 뒤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해리의 곁에 있던 사람들도 나를 보았다. 앞서 걷다가 뒤를 돌아본 해리에겐 아직 물비린내가 나지 않았다. 나는 해리의 장례식장에 가고 있으면서도 그녀가 죽었는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가로등이 듬성듬성 켜진 옥주의 읍내는 그저 적막하고 조용했다. 바람이 아까보다 세게 불었다. 목덜미에 바람이 스쳤다. 몸이 서늘했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껌 종이가 잡히지 않았다. 입에 있는 딱딱해진 껌도 뱉고 싶었다. 해리가 다시금 뒤를 돌아보았다. 나를 보고 환히 웃어 보였다.
  지난 밤 해리는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전했다. 해리가 하고 싶다는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그때 문자를 읽던 나는 한참 동안 핸드폰 액정을 보았다. 갑자기 사라졌던 해리가 다짜고짜 할 말이 있다고 연락이 오니 썩 반갑지 않았다. 나는 무슨 일인지 궁금하면서도 괜히 미운 마음에 뜸을 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리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날이 늦었으니 다음에 다시 연락하겠다고. 또 문자가 왔다. 잘 자, 라고. 다음 날 나는 학교 수업과 연달아 잡혀있던 과외로 해리의 연락을 잊어버렸다. 해리에게 연락해야 하는데, 라는 마음만 숙제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다시 해리에게 먼저 연락이 왔다.
  나는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옥주를 떠났다. 대학 합격 후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짐을 챙기면서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아빠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할머니의 발걸음도 끊은 지 오래였다. 나는 옷을 정리하다가 잠시 책상에 앉았다. 물을 마시면서 장롱과 협탁이 있는 작은 방을 둘러보았다. 내 방에는 챙겨 가져갈 물건보다 놓고 갈 물건이 더 많아 보였다. 책상에는 어젯밤에 해리에게 쓴 쪽지가 있었다. 물컵을 내려놓았다. 나는 쪽지를 들고 일어났다. 바로 건너편 집인 해리의 집으로 갔다. 현관문을 두드렸다. 해리의 언니가 나왔다. 해리네 집의 거실에는 티브이가 우두커니 켜져 있었다.
  “해리가 요즘 친구 집에 가서 안 오네.”
  해리네 언니가 해리의 안부를 전해주었다. 언니의 배가 동그랗게 부풀어있었다. 언니는 부엌으로 갔다. 나는 해리 방에 들어갔다. 방바닥에는 귤 박스가 아무렇게나 놓여있었다. 나는 쪽지를 해리의 책상에 두려다가 말고 문을 굳게 닫았다. 언니가 부엌에서 나왔다. 언니는 미숫가루를 건네주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미숫가루를 다 마셨다. 과수원에서 직접 키운 옥수수도 넣었다던 미숫가루는 유독 더 달고 고소했다.
  그 겨울이 지나고 봄이 돼서야 해리에게 전화가 왔다. 해리는 대전에서 미용학원에 다니며 지내고 있다고 전해주었다. 얼마 되지 않아 해리의 전화가 또 왔다. 이른 열대야로 잠 못 이룰 무렵이었다. 나는 전화를 받느라 룸메이트가 자는 기숙사 방에서 나왔다. 조용한 복도를 지나 휴게실로 향했다. 소등한 기숙사는 캄캄하고 무더웠다. 핸드폰 너머로 해리는 달뜬 목소리로 혼인신고를 했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이상하게 해리에게 축하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옥주를 잊을 수 있겠다고 믿었던 무렵에 기다린 아빠의 연락을 받았던 참이었다.
  “세경아 너는 다 이해하지?”
  아무도 없는 휴게실에 들어와 전등을 켰다. 나는 핸드폰을 귀에 댄 채 다른 손으론 부채질하고 있었다. 전화기 너머 해리의 목소리는 무언가에 쫓기고 있는 것 같았다. 휴게소의 냉장고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언제부터 해리를 다 이해하고 있었나.
  “해리야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나는 해리와의 전화를 끊었다. 휴게소 식탁 의자를 꺼내 앉아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냈다. 쪽지는 주머니에서 헤지다 못해 찢어지고 있었다. 서울에 올라오고 나서도 나는 해리에게 전해주지 못한 쪽지를 호주머니에서 넣어 다녔다. 나는 쪽지를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다음날 반소매 티셔츠를 찾아 꺼내 입던 아침이 되어서야 해리에게 쪽지를 전해주지 못할 것 같다고 예감이 들었다.
  일 학기 종강을 앞두었을 무렵 다시 해리에게서 문자가 왔다. 일주일 뒤에 나를 보러 온다고 했다. 나는 문자를 읽고 그날에 만나기가 어렵다고 할까 순간 고민했다. 해리를 보기 껄끄러워하는 내가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알겠다고 답장하며 조심히 오라고 적은 뒤 전송 버튼을 눌렀다. 나도 해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얼마 전에 아빠를 만났다고. 아빠를 만난 뒤로 자꾸 허기가 진다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거울을 보며 말을 삼켰다. 오랜만에 거울 앞에 서니 그새 붙은 살에 내 얼굴이 낯설어 보였다. 일주일 뒤 나는 머리를 빗고 해리를 마중 나가려 서울역으로 향했다. 역의 플랫폼에 섰다. 전광판에 잠시 후 케이티엑스가 들어온다는 알람이 떠있었다. 멀리서 케이티엑스가 보이기 시작했다. 작은 점으로 보이던 열차는 금세 가까워졌다. 문이 열리더니 사람들이 하나둘 내렸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해리를 찾았다. 나를 본 해리의 얼굴이 환해졌다. 해리가 입은 하늘색 블라우스도 화사해 얼굴을 더욱 밝게 만들어주었다. 해리에게 손을 흔들면서도 나는 입고 나온 통 넓은 청바지가 괜히 부끄러웠다. 해리는 반갑다며 뛰어와 내 손을 잡았다. 해리의 손끝이 차가웠다. 찬 손과 달리 블러셔를 바른 해리의 말간 두 볼은 활기를 띠고 있었다. 너도 참고 있었구나. 나는 방금까지 부끄러웠던 무릎 나온 청바지가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우리는 서울역 근처 샤부샤부 집으로 들어갔다. 해리의 손이 차니 따뜻한 음식을 먹이고 싶었다.
  “결혼했다며 어때?”
  맞은편에 앉은 해리에게 물을 따라주면서 말했다. 해리는 물컵을 들고 물을 입에 머금었다. 어딘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우리가 주문한 샤부샤부가 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냄비는 지글지글 끓었다. 나는 국자로 국물을 떴다. 부지런히 고기와 채소를 접시에 담아 해리에게 건넸다. 해리는 허기졌던 사람처럼 숟가락을 들었다. 나는 허겁지겁 국물을 떠먹는 해리를 바라보다가 내 공깃밥을 덜었다. 해리에게 더 주었다. 해리가 고개를 들고 나를 보았다. 해리의 하늘색 블라우스 가슴팍에 땀으로 젖어 작은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나는 해리의 접시를 들어 소고기와 당면을 국자에 가득 떴다.
  “많이 먹어.”
  “아침 일찍 출발했더니 배고프네.”
  해리는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은행 앱에 들어갔다. 앱 속 통장 잔액을 확인했다. 나는 다시 핸드폰을 집어넣고 해리의 접시에 버섯과 청경채도 더 담아주고 종업원에게 소고기 일 인분을 추가해달라고 말했다. 해리는 조금 웃어 보이곤 국물을 떠먹기 바빴다. 해리는 오랫동안 굶주린 것 같았다.
  “앞으로는 도망치지 않으려고.”
  내가 준 밥까지 다 비우고 나서야 해리는 입술을 뗐다. 나도 괜찮은 대답을 찾으려고 했지만 막상 고를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나는 스테인리스 컵을 들었다. 해리는 인제 그만 가봐야겠다고 말했다. 나는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해리를 서울역에 배웅하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책상에 앉아 바지 속에 있던 쪽지를 꺼냈다. 쪽지는 휴지 조각처럼 낡아버렸다. 나는 쪽지를 북북 찢어서 버렸다. 이제는 무슨 말을 적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뒤로 해리의 연락이 와도 내가 먼저 피해버렸다. 해리의 말을 듣기에는 나도 지쳐있었다.
  어느덧 옥주 장례식장의 간판이 보였다. 해리가 걸음을 멈췄다. 해리는 나를 보더니 들어가기 전에 담배 한 대를 피우자고 말했다. 우리는 장례식장 주차장의 구석으로 갔다. 나는 껌 종이에 껌을 뱉고 라이터의 불을 당겼다. 해리에게 불을 가져다주었다. 담배를 문 해리는 불 앞에서 숨을 깊이 마셨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도 담배를 물었다. 해리는 다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담배 연기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다 피운 담배꽁초를 쓰레기통에 던졌다. 해리는 담배를 쥔 손이 어설펐다. 나는 해리가 어디서 담배를 배웠는지 궁금했다. 코트에 손가락을 비비고 냄새를 맡아봤다. 냄새는 빠지지 않았다. 해리도 담배를 다 피우고 꽁초를 털었다.
  “이제 들어가 볼까.”
  해리는 담배를 잡았던 손을 털며 말했다. 앞장서서 장례식장으로 들어가는 해리의 긴 머리카락은 발을 내디딜 때마다 살랑거렸다. 괜히 코끝이 간지러웠다. 해리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궁금했다. 장례식장으로 들어가니 향냄새와 섞인 바람 냄새가 강하게 났다.
  “안 들어오고 뭐 해?”
  먼저 들어간 해리가 나를 보더니 물었다. 나는 해리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장례식장에는 해리 앞으로 온 화환보다 부모님 앞으로 온 화환이 듬성듬성 있었다. 나는 장례식장에는 처음 가보았지만 식장이 썰렁하다는 것을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해리가 성큼성큼 분향소로 들어갔다. 나도 해리를 따라 들어가기 위해 신발을 벗다가 다시 놀라서 가만히 서 있었다. 이곳은 유독 산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의 냄새가 구별되지 않았다. 거기서 그들은 서로 어울려 밥을 먹고 있었고 고스톱을 치고 있었다. 멀리 분향소에서 해리의 영정사진이 보였다. 교복을 입은 해리는 밝게 웃고 있었다. 해리는 어느새 육개장이 든 일회용 국그릇을 들고 와 자리를 차지했다. 나는 밥을 먹는 해리를 지나쳐 분향소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해리의 가족들은 지쳐 보였다. 나는 향을 피우고 절을 올렸다. 해리의 언니는 세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아이를 업고 있었다. 아이는 곤히 자고 있었다. 그때 언니 배 속에 있던 아이인 것 같았다.
  “여기 육개장이 맛있어.”
  식탁에 앉았다. 아주머니가 쟁반을 가지고 왔다. 내 앞에 밥상을 차려주었다. 나는 하얀 플라스틱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먹었다. 국물은 미지근했고 반찬을 조금 집어 먹다가 물을 마셨다. 다시 숟가락을 들었지만 밥이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빨개진 숟가락으로 국에 있는 고깃덩어리를 찔렀다.
  “해리야 저 사람들은 다 누구야?”
  해리가 육개장이 담긴 그릇을 밥상에 내려놓았다. 자리에 앉다가 해리가 사방을 훑어보았다. 나는 해리에게 왜 불렀느냐고 더 묻고 싶었지만 말을 삼켰다. 해리에게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해리는 자리에 앉았다. 내 밥을 가지고 가 육개장에 밥을 말았다.
  “세경아 우리 가까이 살았잖아.”
  “그치 그래서 매일 붙어 다녔지.”
  나는 물을 마시다가 멈췄다. 그리고 해리에게 물어보았다.
  “우리가 지금 몇 살이지.”
  “이제 곧 스물넷이 되네.”
  “우리 어릴 때 먼저 일어난 사람이 아침에 깨워줬잖아.”
  “그치, 내가 자주 너희 집에 가서 깨웠지.”
  “근데 이제는 그럴 일이 없으려나.”
  “나중에는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더 말을 하려다가 물컵을 내려놓았다. 해리는 그릇째 들어서 밥을 먹고 있었다.
  “그렇게 맛있어?”
  내가 물었다. 해리는 다 먹은 그릇을 내려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까 해리가 국물을 삼킬 때마다 목젖이 움직였다. 해리는 그때 서울에서 만나 샤부샤부를 먹었던 날처럼 며칠은 굶은 것 같아 보였다.
  “배 많이 고팠어?”
  해리는 물티슈로 입을 닦고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나는 해리와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일출을 보러 갔던 군산의 바다가 다시 떠올랐다. 새해의 바다는 우리가 상상했던 만큼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밀물 때를 못 맞춘 탓에 바다는 상상과 달리 갯벌이었다. 하지만 새해이니 기분만큼은 남달랐다. 비응도에서 우리는 새해라고 떡국도 얻어먹을 수 있었다. 떡국을 먹고 난 뒤에는 몸이 따뜻해져 바다를 따라 한참 걸을 수 있었다. 바닷길을 따라 걷다 보니 편의점이 보였다. 나는 해리에게 편의점을 가리켰다. 편의점으로 걸어갔다. 나는 온장고로 걸어가 캔 코코아 두 개를 꺼냈다. 계산하고 다시 밖으로 나오니 바람이 불었다. 나는 코코아 캔을 따서 해리에게 건넸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라 왔다. 우리는 코코아를 나눠 마셨다. 아까 잃어버린 보온병은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곳은 우리가 기대하던 바다와 눈앞에 있는 달랐지만 코코아의 단맛이 그곳까지 가느라 고생한 피로를 녹여주기 충분했다.
  해리 뒤로 해리의 부모님은 앉은 채로 졸고 있었다. 향이 다 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촛불에 향을 다시 태웠다. 향은 불에 잘 붙지 않았다. 나는 불 끝에 그을린 향이 연기를 뿜는 것을 보고 꽂았다. 해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해리는 손끝으로 장례식장 밖을 가리켰다. 나는 해리를 따라 조용히 따라갔다. 찬바람이 불었다. 겨울 냄새는 아까보다 더 진하게 났다. 나는 추워서 가지고 나온 코트를 입었다. 그때 해리가 입을 뗐다.
  “세경아 우리 바다 끝은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해 했잖아.”
  나는 해리를 따라 발걸음을 멈췄다. 해리는 장례식장 앞에 있는 평상에 가 앉았다. 그때 우리는 다시 옥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그 너머는 이곳과 다를 거라고 이야기를 나눴다. 조곤조곤 말하고 웃다가 누구랄 것 없이 어느새 잠들어버렸다. 수평선 너머는 여기와 다를 거라고 믿었다. 여기와 다르게 행복만 있을 거라고. 하지만 나는 그건 도피였다는 사실을 서울에 올라오고 얼마 되지 않아 깨달아버렸다. 해리는 자꾸 더 멀리 도망가고 있었다. 나는 어쩌면 수평선 안쪽보다 바깥쪽은 더 감당되지 못하는 일이 자꾸 벌어지는 것 같아 무서워졌다.
  평상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서 별은 여전히 쏟아질 것처럼 보였다. 라이터를 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해리를 바라보았다. 나는 해리에게 말 못한 사실이 있었다. 해리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기 전에 오 년 만에 아빠가 나를 찾아왔다. 오랜만에 본 아빠는 광대뼈가 보일 정도로 말라 있었다. 나는 아빠 몰래 핸드폰으로 통장 잔액을 확인했다. 그리고 아빠를 데리고 학교 근처 백반집으로 갔다. 나는 김치찌개를 덜어 아빠에게 건넸다. 아빠는 군말 없이 내가 공깃밥에 올려준 고기를 먹었다. 밥을 다 먹고 나서는 아빠를 택시에 태웠다. 할머니가 떠난 골목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빠가 탄 택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아빠가 다시 나에게 올지 알 수 없었지만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해리는 담배꽁초를 아무렇게나 버렸다. 어느새 해리에게 바람 냄새가 은은하게 났다. 해리도 강과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해리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해리를 불렀다. 해리가 나를 보았다. 나는 해리를 세게 껴안았다. 어쩔 수 없이 삼키고 말았을 말을 떠올렸다. 가끔은 모르고 지나가는 게 나을 시기가 있었다. 나는 언제나 진실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아빠에게서 나던 바람 냄새를 모르는 척했을 적에도, 사실 아빠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어도 나는 아빠를 산 사람처럼 백반집에 데려가 밥을 먹였다. 해리가 나를 떼어냈다. 해리는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정수리 너머로 넘겼다. 해리의 손길은 차갑거나 따뜻하지 않았다. 그때 군산에서 해리가 내 머리카락을 만질 때는 장갑을 낀 손이라 간지러웠는데 이제는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해리야 자고 갈 거야?”
  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옆에서 자고 가려고.”
  해리는 창문 너머 자신의 영정사진 곁에 앉아서 졸고 있는 어머니를 가리켰다. 해리에게선 바람 냄새가 더 진하게 풍겼다. 우리는 평상에서 일어나 다시 장례식장으로 들어갔다. 아까보다 장례식장엔 바람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바람에서는 물비린내가 났다. 나는 이제 가보겠다며 가방을 챙겼다. 해리는 코트의 주름도 털어주더니 자신의 목도리를 매어주었다.
  “세경아 조심히 가.”
  “너나 조심히 가.”
  나는 괜히 툴툴거리면서 다시 해리를 끌어안았다. 아까보다 몸에 힘이 더 들어갔다. 어릴 적에 나던 햇빛에 말린 이불 냄새가 물비린내 사이에서 얼핏 다시 났다. 해리가 수평선 너머로 건너가는 모양이었다.
  “조심히 가.”
  해리가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해리의 손끝이 서늘했다. 나는 해리의 손을 내 손바닥에 사이에 두고 비볐다. 해리의 손끝에는 온기가 쉽사리 생기지 않았다. 해리가 나를 보고 웃었다. 나도 포개진 손을 보다가 웃어버렸다. 해리가 하고 싶은 말이나 내가 삼킨 말이 비슷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굳이 아는 사실을 입 밖으로 내밀고 싶지 않았다. 장례식장의 유리창 밖 너머로 하늘이 조금씩 환해지고 있었다.
  “잘 가 세경아.”
  “너도.”
  나는 장례식장을 나왔다. 오랜만에 온 옥주의 아침 공기는 여전히 차고 맑았다. 세상이 조금씩 환해지고 있었다. 나는 다시 터미널로 향했다. 나는 걷다가 괜히 뒤돌았다. 해리가 나를 보고 있을 것 같았지만 해리는 보이지 않았다. 문득 집에 가고 싶었다. 핸드폰으로 시계를 보았다. 첫차가 출발할 시각이었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나는 다시 옥주에 오게 되면 집에 가보기로 다짐했다. 마당 마루에 옥수수 알을 말리던 자루가 떠올랐다. 옥수수는 우수수하고 평상에 펼쳐져 있었다. 할머니는 옥수수 알이 마르면 방앗간에 가지고 갔다. 옥수수를 튀겨서 물을 끓여주었다. 옥수수 물은 여름에 차게 마시면 달고 고소했다. 또 겨울에는 따뜻하게 마셨다. 할머니는 물을 자주 마시면 건강에 좋다며 겨울에는 따뜻한 물과 함께 냉동실에 넣어둔 옥수수를 쪄주었다. 옥수수를 먹다 보면 해리가 귤을 들고 우리 집에 놀러 왔다. 우리는 전기장판에 들어가 옥수수를 먹고 귤을 까먹었다.
  바람이 불었다. 해리가 매어준 목도리 덕분에 목덜미 사이로 바람이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버스터미널로 걸어갔다. 아까까지 보이지 않던 가게 간판 글자가 보였다. 조금씩 세상은 자꾸 환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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