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나만의 나, 이지우

나만의 나

  학기 말은 언제나 어수선하다.
  선생님은 진도가 끝난 수업 시간엔 영화를 틀어주셨다. 처음에는 다들 집중했지만, 영화 감상 시간이 늘어날수록 영화가 질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선생님께 자유시간을 달라고 항의했고 선생님은 너무 큰 소리를 내면 안 된다는 주의와 함께 자유시간을 허락해주셨다.
신난 아이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만들어서 모였다. 나도 효주와 하늘이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의 곁에는 이미 다른 여자아이들도 모여있어서 북적북적했다.
  “오늘 아침 등굣길에 문방구에 잠깐 들렸는데 새로운 팝잇이 들어왔대.”
  효주는 언제나 문방구의 신상품을 다 꿰고 있었다. 어찌나 발이 빠르고 눈썰미가 좋은지 학교 근처의 문방구 세 곳은 모두 효주의 손아귀에 있었다. 문방구 사장님들과도 친해서 효주는 사장님들에게 신상품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들었다.
  효주는 오늘처럼 문방구의 신상품 소식을 가장 먼저 들고 오기도 하고 중학생 언니들에게 받은 것들을 뽐내기도 했다. 언니들에게 받은 화장품, 스티커, 키링. 아이돌 앨범 등 새로운 물건을 보여주기도 했고, 요즘 중학생 언니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을 듣고 알려주거나, 머리카락 관리법, 손톱이 예뻐지는 법 등 효주는 유튜브보다도 빠르게 배워 와 알려주기도 했다.
  우리에게 효주의 ‘언니들이 알려줬다’는 말은 마법의 주문과 같았다. 그 말은 우리를 홀렸고 우리 반 여자아이들은 효주를 따라 하기 바빴다. 때로는 남자아이들까지 효주를 따라 하곤 했다. 우리 반의 유행은 효주가 선도했다.
  “효주야 오늘은 뭐 없어?”
  “오늘은 스티커 들고 왔는데 볼래?”
  효주의 자랑 시간이 시작되었다. 하늘이의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효주는 가방에서 스티커를 잔뜩 꺼냈다.
  와!
  아이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효주가 꺼낸 스티커들은 한눈에 봐도 학교 앞 문방구에서 천원, 천오백 원에 파는 것들과 달랐다. 효주는 뿌듯한 표정으로 스티커들을 책상 위에 올렸다. 몇 가지는 효주가 좋아한다고 보여준 SNS의 유명 작가님의 스티커도 있었다.
  “예쁘지? 너희 스티커만 파는 가게 가봤어?”
  한껏 입꼬리가 올라간 효주가 설명을 시작했다. 지난 주말 언니들을 따라다녀 온 팬시용품점은 스티커가 수십 명의 작가별로 진열되어있었는데 그곳을 전부 둘러보는 데만 한 시간 가까이 걸린 것 같다고 말했다.
  “우와! 그런 곳이 있어?”
  “스티커만 판다고?”
  아이들의 부러움이 섞인 반응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요즘 다이어리 꾸미기가 반에서 소소하게 인기를 끌고 있어서 그런지 스티커에 대한 반응이 좋았다.
  아이들은 효주가 가져온 스티커를 하나하나 살펴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저 토끼는 어디가 귀엽고, 고양이는 이 부분이 정말 귀엽다며 스티커 감별사가 된 것처럼 열띤 토론은 쉬는 시간 종이 울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나는 그 속에서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꽃무늬 스티커를 눈여겨보았다. 큰 장미 여섯 개가 종이를 채웠고 작은 꽃들이 남은 자리를 채우고 있는 스티커였다. 남들이 보면 촌스럽다고 비웃을만한 스티커였다. 내 취향은 다른 아이들이 말하는 ‘촌스러운 것’에 가까웠다. 특히 이런 촌스러운 꽃무늬를 좋아했다. 남들에게 말하면 이해받지 못하는 걸 알고 있어서 효주가 말하는 ‘예쁜 것’에 관심을 주고 있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아이들이 하나둘 흩어졌다. 나랑 하늘이도 제자리로 돌아가려고 일어섰는데 효주는 아주 비밀스럽게 우리에게 스티커를 주겠다고 말했다.
  “너네한테는 특별히 하나씩 줄게. 한번 골라봐.”
  “정말? 우리한테 줘도 돼?”
  “고마워! 효주야.”
  하늘이와 나는 고심해서 스티커를 골랐다. 사실은 이미 마음에 든 스티커가 있었지만 고르지 못했다. 효주는 분명히 눈을 찡그릴 것이기 때문이다. 효주와 하늘이와 멀어질 순 없으니까….
  “하늘이는 이 햄스터가 잘 어울리고, 아리는 강아지가 좋겠다.”
  “오! 역시 효주는 눈썰미가 좋구나?”
  “고마워. 효주야.”
  효주는 하늘이에겐 햄스터가 그려진 스티커를 나에겐 강아지가 그려진 스티커를 내밀었다. 효주는 고래가 그려진 스티커를 빠르게 내려두고 다람쥐 스티커를 받았다. 하늘이는 효주가 골라준 햄스터 스티커가 정말 마음에 든다며 웃었다. 효주가 골라준 스티커는 귀여웠지만, 꽃 스티커만큼 예쁘진 않았다. 나는 아쉬운 마음을 숨기고 고맙다고 말했다. 가끔은 눈썰미 좋은 효주가 내 취향을 알아봐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날 하교 후 들린 문방구에서 두 사람 몰래 꽃무늬 스티커를 샀다. 아까 봤던 것과 달랐지만, 마음에 들었다.

*

  우리의 모든 시간표가 영화감상이 되기 전에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다. 방학은 왜 그렇게 빠르게 지나가는지 어느새 나는 6학년 새 학기를 마주했다.
  ‘6학년 4반’
  앞문에 부착된 새로운 반의 명단 표를 살펴보았다. 다행히도 효주와 하늘이가 있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하고 교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는 5학년 때와 비슷하게 비슷한 출석번호를 받았고 셋이서 나란히 앉았다. 새 학기에 새로운 친구를 만드는 것만큼 어려운 게 없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효주는 6학년이 되어서도 빠르게 ‘유행 선도주자’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내년이면 중학생이 되기 때문일까? 아이들은 ‘중학생 언니들’이 알려줬다는 말에 눈을 빛냈다.
  “요즘 효주가 쟤네들하고 더 많이 어울리는 것 같지?”
  “조금…?”
  효주는 종종 다른 무리의 친구들과 어울리더니 이제는 그 횟수가 늘어서 우리와 다니는 건지 그 아이들과 다니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하늘이는 그런 효주의 행동에 불만을 품었지만, 효주 앞에선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

  오랜만에 셋이서 번화가에 나가기로 했다. 6학년이 되고 처음으로 셋이서 번화가에 나가게 되어서 나는 가장 아끼는 꽃무늬 원피스를 꺼내입었다. 키가 조금 커서 원피스가 살짝 짧아지긴 했지만, 연분홍색 바탕에 파란색, 주황색 꽃무늬가 그려진 예쁜 원피스였다.
  나는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약속 장소인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아리야! 그 원피스를 입고 가겠다고?”
  “…왜?”
  “그 촌스러운 옷을 안 입는다고 안심했더니 아직도 가지고 있었어?”
  효주와 하늘이는 먼저 도착해있었다. 내가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효주는 깜짝 놀란 목소리로 내 원피스를 지적했다. 그렇게 이상한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촌스럽다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옷인데. 효주가 앙칼진 목소리로 그 촌스러운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놀러 갈 거라면 자신은 안가겠다고 외쳤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나랑 놀러 가기 싫은 정도로 이 옷이 그렇게 별로인가? 나는 효주와 내 옷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말을 왜 그렇게 해?”
  “뭐?”
  “아리가 입은 옷이 마음에 안 들어서 안 가겠다니!”
  하늘이가 내 앞에 섰다. 나를 지켜주는 것처럼 내 앞에선 하늘이가 효주에게 소리쳤다. 하늘이는 언제나 효주의 말에 ‘효주가 최고’라고 맞장구쳐주기만 했는데. 늘 효주가 옳다고 말하던 하늘이라서 더 놀랐다. 효주가 당황하더니 이내 얼굴을 찡그렸다.
  “솔직히 저 옷은 아니지! 육 학년인데 저런 애 같은 옷을 입는다고?”
  “친구 취향도 무시하는 애가 뭘 알아?”
  “뭐?”
  “너, 매번 네가 제일 잘난 척하는데! 전혀! 하나도! 잘난 거 없어!”
  하늘이와 효주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버스 정류장에 서 있던 사람들이 우리들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하늘이와 효주의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둘을 말려야 하는데 발만 동동 굴렸다.
  “효주, 너는 우리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지?”
  효주가 입을 꾹 다물었다.
  “어차피 요즘에 다른 애들이랑 다니잖아. 그냥 우리랑 놀지 마!”
  “야! 이 하늘!”
  하늘이의 절교 선언에 효주는 거리가 꽉 차도록 큰소리로 하늘이의 이름을 불렀지만 하늘이는 무시했다. 내 손을 잡고 나를 끌고 걸어가는 하늘이를 따라가며 효주를 뒤돌아보았는데 매고 있던 가방을 내던지는 게 보여서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화난 효주는 무서웠다.

  효주는 그날 이후로 정말로 우리와 다니지 않았다. 효주는 자주 어울리던 다른 무리의 친구들과 잘 어울렸다. 그 무리는 효주처럼 전부 어른스러워서 효주가 이제야 잘 맞는 친구들은 사귄 것 같았다.
  효주는 가끔 우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럴 때마다 하늘이는 효주를 죽일 듯이 째려보며 나를 데리고 자리를 피했다. 두 사람이 싸운 원인이 내 꽃무늬 원피스인 것 같아서 괜히 죄책감이 들었다. 그날 그 옷을 입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셋이서 지냈을 텐데.
  “이게 더 나은가? 저게 더 나아?”
  “둘 다 예쁜 것 같아. 너는?”
  하늘이와는 하굣길에 종종 문방구에 들렸는데 하늘이는 효주와 어울릴 때 산 것들을 전부 새로 사야겠다고 잔뜩 기합이 들어가 있었다.
  하늘이는 새로 산 다이어리를 꾸며야 한다고 고등어가 그려진 스티커와 개구리가 그려진 스티커를 들고 고민하고 있었다. 확실히 효주가 들고 온 강아지, 고양이와 같은 동물들이 그려진 스티커들과는 많이 다른 스티커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하늘이는 선택하지 못하고 두 개 다 제자리로 돌려두었다. 우리는 다음번에 다시 오기로 했다.

*

  이번 주말에 하늘이와 둘이서 번화가에 놀러 가기로 했다. 저번 주에 효주와의 싸움으로 못 갔으니 이번엔 제대로 놀아보자고 하늘이가 활짝 웃었다.
  “아리야, 꽃무늬 원피스 입고와. 네가 정말 좋아하는 거잖아.”
  하늘이는 꼭 원피스를 입고 오라고 말해줬다. 나는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싸운 이후로 버릴까도 고민해봤지만, 여전히 꽃무늬 원피스가 좋았다.
  번화가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팬시용품점으로 갔다. 운명이라도 되는 건지 우리는 거기서 효주와 마주쳤다. 효주가 급하게 등 뒤로 무언갈 숨겼는데 하늘이가 나를 자신 쪽으로 잡아끌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다.
  “하늘이랑 아리잖아?”
  효주는 언니와 같이 나온 것 같았다. 효주를 지나치려는 하늘이와 나를 부른 건 효주의 큰 언니였다. 몇 번 효주네 집에 놀러 가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언니를 보고 나서 늘 어른스럽던 효주의 스타일이 언니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언니, 가자….”
  효주가 언니의 가방을 잡아당겼다. 언니는 우리 셋을 번갈아 보더니 묘한 미소를 지었다. 언니는 효주가 이끄는 대로 걸어가면서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

  다음날 하교 시간에 효주가 우리 둘을 불러세웠다. 계단을 내려가던 우리 둘은 효주를 올려다보았다. 효주의 표정이 낯설었다. 늘 당당하던 효주가 긴장하고 있었다! 그 효주가! 효주는 두 계단씩 걸어 내려왔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효주는 손에 들고 있던 스티커를 우리에게 건넸다.
  “…미안해.”
  나는 너무 놀라서 손에 들고 있던 신발주머니를 떨어트렸다. 효주가, 그 효주가! 사과했다. 효주와 지내면서 사과하는 것은 처음 들었다. 하늘이도 놀랐는지 입이 쩍 벌어진 채였다. 효주의 얼굴이 사과만큼 붉어져 있었다. 스티커를 쥐고 있는 손이 떨리는 게 보였다. 그 효주가!
  “나, 너희 취향 알아. 하늘이는 물고기 좋아하지? 아리는 꽃무늬 좋아하고….”
  그제야 효주가 꺼낸 스티커가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다리가 달린 고등어가 그려진 스티커와 노란 수선화가 그려진 스티커였다. 고등어 스티커는 하늘이가 며칠 전부터 살까 말까 고민하던 캐릭터였다. 효주의 말대로 우리 둘의 취향에 딱 들어맞는 스티커였다. 눈썰미가 좋은 효주가 취향을 몰라주던 게 서운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너희가 나랑 같은 걸 좋아하면 좋을 줄 알았어.”
  나는 수선화가 그려진 스티커를 받았다. 하늘이는 고등어 캐릭터를 노려볼 뿐이었다.
  “앞으로는 안 그럴게. 미안해.”
  효주가 한 번 더 사과하자 하늘이가 스티커를 받았다. 효주가 울지 않으려고 눈에 힘을 주고 있는 게 보였다. 효주다워서 웃음이 나왔다. 하늘이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웃었고, 효주가 우리를 따라 어색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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