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가을 위의 여자 외 3편, 이하나

가을 위의 여자

두물머리 변두리에 앉아 낙엽을 주워다
푸르스름한 살냄새를 맡는다
젖은 줄기 사이로 지문처럼 박힌
자줏빛 반점의 이름을 묻고 싶다
늦가을이면 있다
나를 두고 늙어가는 가죽

그 여자
앳된 청춘을 지나쳐 가을 위로 내려앉은 여자
지금도 단풍나무 발치로
멍든 살점을 태연하게 밀어내며
옷 벗은 가지처럼 희끗희끗한 하루를 보내는

살갗 아래 여름이 고여있을 것이다

이곳의 강풍은
어스름 깔린 새벽을 보듯 맞이해야 한다
이제 맨몸에 익숙해져야겠지

엄마는 벌써 환갑이다

가을은 내 속도 모르고 자꾸 낙엽을 떨군다

사랑이 도망간 오후

나는 신호등 건너편에 우두커니 서서
도망치는 사랑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어
사랑은 붉은 와인잔이
대리석으로 굴러떨어져 조각나는 순간처럼 나에게 찾아왔어
아 이런 게 사랑인가 싶었어
사랑은 내게 속삭였어
내가 너에게 완전히 스며들지 못하는 건 우리가 서로에게 간절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그 말을 전하면서도 사랑은 온몸에 숨긴 불덩이를 내 쪽으로 조금씩 흘렸고
나는 기꺼이 사랑에게 손을 내밀었고
우린 서로에게 데이면서도 끝까지 손을 놓지 않았어
그런데 내 사랑은 도망가는 거였어
아무도 모르게 생긴 고름 딱지처럼
익숙한 자리에 붙어있다가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거였어
언젠가 내가 할퀸 상처가 아물 무렵이었어
겨울잠을 자듯 적당히 포근하고, 길고, 아늑했던 내 사랑이
지금 저 건너편으로 도망치고 있어
그치만 나는
사랑이 저 먼 아스팔트 끝으로 가라앉을 때까지
주홍빛 굉음을 내며 노을처럼 부서져 내릴 때까지
그를 붙잡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어
멋대로 찾아와놓곤 멋대로 도망가는 사람도 사랑이긴 했던 거구나 하면서

가벼운 사람

거지의 돈통에 천원을 던져 넣으며
비웃음을 살까 얼른 도망쳤다
나는 새벽까지 이마를 밝히는 사람이고
작은 불씨에도 혀를 깨물거나 환각을 보는 사람이라
천성이 무거운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다
시간이 길들이는 거였다 나를
역을 나오자
보이는 건 바람과 반대로 흩날리는 빗물
역주행하는 시간이 도로 위로 장막을 펼치고 있다
마치 내가 엄마가 되고
엄마가 내가 되는 것 같은
희끄무레한 풍경 속
건너편에 우산을 든 엄마가 있다

너는 너무 생각이 많아
비는 떨어지는 거고, 거지는 구걸하는 거고, 돈통은 돈 넣으라 있는 거고
근데, 그래도 고맙다 항상

빗길에서 넘어진 엄마가
까진 무릎으로 내 등에 얹혔다

아, 빗방울보다 가벼워진 사람

갈대밭에 길을 트듯
비를 헤집고 걸어가는데
웅덩이에 아이 두 명 일렁인다
나는 얼른 빗속으로 얼굴을 숨기고

누군가를 등에 지는 일은
생각이 많아지는 일이다

몽당연필

그 애는 반에서 가장 키가 작았다
짝이 되고 나서야 처음 이름을 불렀다
현인 줄 알았는데 연이라 그랬다
알면서도 웃어주던 보조개
농익은 배를 닮아
억지로 찌르면
아래로 떨어지며 단내를 풍길 것 같아
건드리진 못했다
나만 아는 정원이라고 생각했다
보조개에 물도 고이고 꽃도 있고 열매도 피어날 거라고

그 애 앞에서
말투도, 표정도 긴 속눈썹으로 가린 채
개기월식을 맞이하듯 빨갛게 자욱해지던 어린 소녀가
서랍에서 굴러다니던 몽당연필 하나에 되살아났다

그건 그 애가 언젠가 빌려준 것
서랍에 아무렇게나 넣어두었지만
서로가 어떻게 사는지 가늠해보고 싶어
버리지 못했다

이제는 연아, 연아, 하고 부르면
몽당이, 몽당이였지 걔는 하며
두 뺨에서부터 뜨겁게 회오리치는

연필 한 자루에 담긴 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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