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거운 여름
이제 연락이 닿지 않는 친구를 어떻게 생각해?
나는 이 얘기를 주변의 누구에게든 해 보고 싶다. 그래서 했다. 남자친구 석재에게. 석재는 버스를 타고 나를 집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내가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뜨거운 티백을 우리는 동안 또 버스를 타고 돌아갈 것이다. 그 일을 다 할 때까지 석재는 답장이 없었다. 그러다 두 통을 보내왔다.
―음으으음 그냥 싸운 것도 아니고
―그냥 어쩌다 보니?
나는 그러하다고 답을 쳤다. 멀어짐의 양상은 사람마다 다르지. 하지만 싸워서 멀어진 경우는 궁금하지 않다. 답이 오랫동안 오지 않는다. 엄마에게 연락해 보려다 만다. 낮에 소소하게 싸웠다. 항상 겪는 문제로 다퉜다. 언제 어디서고 투덜거리는 오빠를 엄마가 너무 감싸는 것이나, 내 진로 방향을 도마에 올리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긁거나 썰어낼지 엄마 몫인 양 다루는 일 같은 것.
찬물을 끼얹은 얼굴이 점점 미지근해진다. 긴장이 풀린다. 2월이 된 탁상 달력을 본다. 아직 따라 넘기지 않은 스케줄러를 펼치고 새로 추가된 것을 적는다. 미취업자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디지털 교육 특강을 듣게 되었다. 열의가 있는 참가자들은 이후에 기업으로 연계해 줄 수도 있다. 그 외에도 이력서를 넣은 회사의 면접 발표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올해 말에는 자취방의 계약이 종료된다. 하반기까지 제대로 된 일을 구하지 못하면 본가로 내려갈지 모른다. 그때까지 내가 아무 곳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거나, 마침내 모든 열의를 잃어버렸다면.
너는 지금 가망 없음의 상태야.
적적한 집안에 미국 드라마를 틀어 놓았다. 자주 보는 것이다. 의사가 형사에게 말하고 있다. 그 형사는 단기 기억 상실증을 앓고 있다. 자기가 수사하는 사건으로 한해서. 본래는 키우는 강아지에게 먹이는 약과 주기, 어머니와 잡은 약속, 납부하는 관리비의 기한이나 경찰청장이 어제 입고 온 넥타이 색깔까지 기억할 만큼 집요하고 꼼꼼한 사람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런 정보는 까먹지 않는다. 형사는 어째선지 이번에 담당하는 사건만 그 내용을 자꾸 잊는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어제까지 기록해 놓은 사건 파일을 다시 읽고 시작한다. 복잡한 연쇄 고리를 간신히 이해하고 어제의 분량을 독해하면, 남은 시간이 너무 짧다. 형사가 이해하고 그 흐름을 따라잡는 동안에도 사건은 현재진행형이며 범인도 못 잡았다.
매일 매일 처음 보는 사건.
다행인 점은, 그가 기록 파일 내용을 전부 잊어버리지만, 자신이 그 사건을 담당하고 있으며 해결 과정 중에 있다는 걸 잊지 않는 것이다. 매번 처음처럼 파일을 펼쳐 들 뿐, 그는 자기 일을 알고 있다. 사건의 진상으로 다가갈수록 파일에 적은 단서들의 속력이 더뎌진다. 아니, 단서는 단서대로 나아가고 있다. 현재의 범죄가 속력을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가팔라지는 것이다. 차도를 알아보려 방문한 친구의 병원에서 형사는 다시 절망한다. 절망한 형사를 바라볼 때 핸드폰이 울렸다.
석재인가 했는데 영 다른 사람이다. 메신저에서 숨김 처리해 둔 친구였다. 연락처로 보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해서 가려버렸다. 다만 함께했던 일이 적지 않던 사람. 내가 지금보다 어리고, 아는 게 적고, 밤에는 잠을 몰아내며 재밌어하는 일들에 몰두하던 시절에 알게 된 친구. 이제는 버틸 만큼 재밌는 게 없고, 내일 일정은 무섭기에 억지로라도 침대에 눕는다. 약을 타 먹기도 한다. 잠을 자야 하는데 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알림창에 뜬 메시지를 그대로 두었는데 드라마가 멈춘다. 와이파이 연결이 끊긴 것이다. 방의 위치마다 송신이 제각각이다. 나는 인터넷을 다시 연결하고 드라마를 새로고침 한다. 집에 잘 들어왔으며 방금 씻었다는 석재의 연락이 이미 와 있었다. 핸드폰도 노트북도 메신저가 모두 잠깐 멈춰 있던 모양이다. 그렇게 멈춘 사이에 친구의 연락만 날아왔다. 지체를 기막히게 피해서. 나는 기묘했고 떨렸으며, 사실 사랑 같은 뜨거움마저 느꼈지만, 이윽고 그와 멀어진 계기가 떠올랐다. 나의 잘못과 어설픔도 연이어 따라왔다. 직접 묻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가 나를 추궁하거나 내 잘못과 어설픔을 곳곳에 알리기 위해 연락을 해 왔으리란 의심이 들었다. 나를 몰아세우려 할 거라는 불안감이.
드라마가 낮은 사양의 화질로 자동 변경된 채 송출됐다. 형사는 어딘가로 급히 뛰어갔다. 형사니까. 다른 형사들보다 시간이 약간씩 모자란 형사니까. 더 똑똑하고 기민해야 하고, 사건의 흔적을 마약 탐지견보다 빠르게 발견해야 하니까.
나는 아무 답장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2월 일정을 마저 채워 넣고, 오늘의 기분을 한 줄 정도로 적었다. 그런데 열두 시가 넘은 시간에는 어제 날짜인가 오늘 날짜인가. 심상한, 언제나 답은 정해져 있는 고민도 했다. 내가 잠들었는지 궁금한 석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그것을 받았다. 내가 이 시간을 허락하는 유일한 사람은 석재와 나 자신밖에 없다.
‘정경아! 나야. 잘 지내?…’ 미리보기는 거기서 끊겼다. 핸드폰 화면을 가로 모드로 바꿔서 채팅 내용을 더 길게 볼 수 있는 꼼수가 있다. 이 경우에는 안 먹혔다. 친구가 문장마다 엔터를 쳐서 입력했기 때문이다. 뒤이을 내용을 궁금해하면서 커피를 기다리고 있다. 아침이고, 머리를 감아서 개운하다. 간만에 카페에 들어와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졸업 이후 나는 여전히, 또 앞으로도 길게는 하반기까지 준비생일 것이다. 준비생으로서 적당한 규칙을 정했다.
아침 기상은 여섯 시. 눈 뜨면 물 한 컵을 마신다. 물을 따로 또 끓여서 보온병에 담는다. 그 길로 집을 나와 동네 뒷산의 가장자리를 따라 걷는 등산로를 사십 분 정도 산책한다. 가는 이십 분 돌아오는 이십 분이다. 겨울에는 아침이 늦게 와서 어둡다. 조금 무서워도 그냥 한다. 일곱 시쯤부터 하늘 가장자리가 파래지기 시작한다. 집에 들어오면 전날 사둔 우유를 한 컵 따르고 계란도 삶는다.
얼마 전에는 보건소에 다녀왔다. 무료로 건강 검진을 해 준다고 해서 예약을 잡은 것이다. 당일 나온 결과를 보고 약간의 경각이 생겨서, 끼니마다 단백질을 신경 쓰고 간단한 근력 운동도 한다. 유튜브에 올라오는 영상 두 개를 따라서 하고, 탁상 달력에 운동과 식단을 챙겼는지를 적는다. 전부 하는 날도 있고 아예 못 하는 날도 있다. 그래도 한다. 못한 하루가 있어도 멈췄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런 하루 틈틈이, 동네 영화관을 찾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다. 주기적으로 헌혈을 하고 오천 원짜리 편의점 쿠폰으로 교환한다. 다 읽은 책은 깨끗하게 정리해 팔고, 매입되지 않는 책은 종이류로 버린다. 사용되지 않는 짐들을 버리고 물건은 오래 고민하다가 중고나 구제로 산다. 알고 있는 방법을 동원해 이력서를 넣고 집에서 끼니를 때워 먹는다. 곧 있으면 만기 되는 적금이 있고 그중 얼마를 빼고 예금에 넣을지 생각한다. 구청 사이트에서 구인 구직이나 청년 대상 정보들을 찾아 읽고 신청한다. 나는 내 활동성이 늘었다고 생각한다. 작은 소도시에서 살다 서울로 올라온 후 차이가 있다면 그 정도이다. 여섯 시에 퇴근하는 석재의 집에서 저녁을 함께 먹고 나는 다시 집에 온다. 커피가 나왔다.
나는 친구와 약속을 잡길 바라나.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다. 얼마 만이냐고, 잘 지냈느냐고 채팅을 나누다가 직접 얼굴을 볼 날짜를 정할 수 있다. 나는 그 역시 서울에 와 있으며 나와 전철 한 정거장 차이 나는 직장 기숙사에서 지내는 걸 안다. 서로 겹치는 지인들이 있으므로 어쩌다가 한 번씩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도 한 번을 마주친 적이 없네, 용케. 친구는 운전도 할 줄 안다. 더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쉬웠을 테니 그쪽에서는 나를 발견한 적은 있을지도 모른다. 지하철 출입구로 들어가거나, 횡단보도 앞에서 투명하고 무거운 겨울빛에 인상을 쓰고 있는, 입꼬리가 조금 내려간 상태의 나를 그쪽에서는 본 적이 있을지도. 그래서 연락해 온 건 아닐까.
읽지 않은 빨간 표시를 내버려 둔 채 나는 미뤄 왔던 할 일들을 손본다. 그러려고 카페에 왔다. 메일함을 읽거나 정리하고, 본가에서 지내는 가족들에게 안부 인사를 한다. 석재에게도 한두 통 연락을 넣고 다시 이력서를 적는다. 구인 글을 찾고 스크랩하고, 국비로 지원받을 수 있는 학원 중 어디가 가장 적합한지 찾는다. 어느 은행으로 예금을 넣을지도 결정한다. 그런 일을 다 하고 책도 몇 장 읽고 샌드위치를 따뜻하게 데워서 시킨다. 짐을 챙겨 돌아갈 때까지 답을 넣긴커녕 읽지도 않는다. 퇴근한 석재 집의 뜨끈한 방바닥에 앉아 형사 드라마를 틀 때까지 마음은 동하지 않는다.
한참 중요한 장면에 닥쳤는데, 젖은 머리에 흰 수건을 덮고 나온 석재가 핸드폰을 가져다줬다. 화장실에 있더라. 왜 화장실에 놓고 다니니! 습기로 하얘진 화면에 작은 물방울이 묻어 있었다. 우리가 끓여 먹은 냄비 속 어묵국은 바닥을 보인다. 내 앞접시에는 먹다 만 곤약이 쓰러져 있다. 적당히 조미됐고, 지금쯤이면 거의 식었을. 술을 마셨고 약간은 늘어진다. 취기가 가시면 나 자신이 쓰레기로 느껴질 것이다. 지금 풀어진 기분을 믿으면 안 된다. 안 되는데, 나는 약간 신이 난 채로 친구의 연락을 읽어버린다. 어쩐지 애지중지하던 것을 너무 쉽게 누른다. 확인 표시가 지워지고 나는 눈앞에 보이는 걸 그대로 겪는다.
아, 이런 말을 보낸 거였군. 이런 말이었군.
나를 딱히 만나고 싶어 하는 건 아닌 듯하다. 그냥 뭔가를 물어보려 했을 뿐이며, 질문마저 소소하다. 이미 답을 찾았을지도 모르는 것. 시시하다. 시시하다고 입 밖으로 말하자, 곁에 와 앉은 석재가 저 드라마? 하고 묻는다. 나는 물끄러미 형사 얼굴을 본다.
*
뜨거운 물 한 잔. 상아색 빛이 벽을 쏘는 스탠드 조명. 나는 다시 그 두 개가 놓인 책상에 앉는다. 아무리 잡다한 일을 해도 결국은 이 자리로 돌아온다. 나는 항상 이 앞이다. 오늘치 일기를 다 썼고 2월의 계획을 일부 고쳤다.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면접이 잡혔다. 신청해 둔 교육을 듣지 못하거나, 날짜를 바꿔야 한다. 면접 일정이 길어지면 어쩔까. 최종 면접에 불리면 어쩔까. 또 계획을 바꿔야 할 것이다. 만약 그것이 더 발전되면 어쩌나. 어쩌긴. 나는 근로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도 똑같이 전화를 걸고 일정을 수정하겠지. 사이 사이의 매듭을 약간씩 고치거나 튼튼하게 짓고, 지은 걸 보여주거나 가져오는 일을 할 것이다. 자꾸 손등 위로 흘러내려서 한 겹 올려 접은 후드티 소매에는 한 둘씩 실밥이 빠져나온 박음선이 있다. 그런 것처럼.
사람들이 연애하는 프로그램이 서비스될 때마다, 내가 구독하는 OTT 내 일등 콘텐츠 자리가 바뀐다. 그것은 선호도와 화제성 부문에서 항상 앞줄이다. 마우스 커서를 가져다 대면 자동으로 예고편이 나온다. 누군가 울거나 화를 낼 때마다 분위기를 설명하는 음악이 삽입된다. 급진적이거나 부드럽거나 껄끄럽거나 후끈. 알고리즘은 내가 시청한 콘텐츠를 반영해 추천작을 보여준다. 작년 내 계획은 영화 백 편을 보는 것이었고 팔십 편 정도를 시청했다. 사오십 편은 여기서 봤을 것이다. 여기라면, 내 방 침대 위거나 책상 앞에서. 작년의 내가 좋아하거나 싫어했던 걸 기반으로 알고리즘은 숫자를 돌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요새 나는 기억력이 안 좋아진 형사만 매번 틀어 놓는다. 대사도 외울 수 있다. 그의 어떤 행동이 나오면 어떤 노래가 나오고 어떤 장면이 된다. 이제 나는 범인이 누군지도 안다. 최종화는 처음부터 공개되어 있었다.
형사가 옷장에서 셔츠를 꺼내 입고, 시동을 거는 차 열쇠가 달그락거리고, 뛰어다닐 때 신발 밑창에서 밟히는 자갈 소리를 들으며 잠든다. 가끔 총격이 터져도 놀라거나 깨지 않는다. 친구도 석재도 엄마도 이해 못 하겠지만 그렇게 시끄럽고 방해되는 게 귓가에서 울려야 눈 붙이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구청 사이트에서 면접 복 대여를 신청할 수 있다고 한다. 미리 찾아두었다. 자격증의 응시료를 지원해 주는 사업은 삼월부터 받는다. 첫날을 기준으로 연말까지 받는데, 그 사이 예산이 떨어지면 끝난다. 인당 십만 원으로 한도가 있다. 나는 지난달에 하나를 취득했고 시험에 이십삼만 이천 원을 썼다. 그래도 공부하는 수강료는 학교 지원이었다. 만약 이달이 끝나기 전에 취업이 되면 나는 십만 원을 못 받는다. 그렇다고 면접을 보지 않을 수는, 지원 사업에 무작정 신청을 안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혹시 모르니까. 혹시 모르는 것들이 요새의 나에겐 너무나 많다. 매번 의심해야 하는 형사의 용의선상처럼.
혹시 모를 것들이 많은 나는 발밑이 투명한 스카이 워크를 내내 걷는 기분이다. 그게 언젠가 투명 아크릴판이 아니라 진짜로 허공이 되어 버리는 순간이 올 것 같다. 그래서 무섭다. 무섭기에 하던 일을 계속한다. 일의 질과 양을 조금씩 수선하면서. 그럭저럭 괜찮아지는 일을 지속한다. 일찍 일어나고 삼시세끼에 단백질과 채소를 챙겨 먹고 유제품을 섭취한다. 간단한 근력 운동을 하고 바깥에 나가 산의 둘레길을 걷는다. 집을 청소하고 정기적으로 헌혈하고 무언가를 팔거나 사들인다. 눈에 보이지 않는 돈은 계속해서 나가고 있다. 그건 내 가족이, 석재가, 또 다른 누군가가 대신 때워주고 있는 자리다. 나는 그들의 자원을 야금야금 깨 먹으며 함께 살고 있다.
석재가 작은 알바 자리를 알선해 주었다.
사회복지기업에서 하는 사무 보조 일이다. 발표 자료를 만들고 엑셀 시트에 일정 값을 넣는다. 다른 팀원보다 일찍 나와 사무실을 미리 청소해 둔다. 따뜻한 난방이 있고 내 자리 의자는 푹신하며 목과 허리 부분이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점심시간에는 사람을 모아 밥을 먹으러 간다. 가장 마지막에야 뒤늦게 불리지는 않는다. 아르바이트생이라고 매정하게 보지는 않고, 오히려 한 번 더 신경을 써준다. 아마 불쌍한 거겠지? 식당에서도 거의 가운데 자리에 앉는다. 반찬을 조금씩 떠먹고 백반을 오래 씹는다. 누군가 이야기를 하면 으음, 고개를 끄덕이며 웃고 질문이 넘어오면 성의껏 대답한다. 고생이 많다고들 한다. 정경 씨 전공이 그거랬지? 그럼 이런 걸 하나? 혼자 살고. 대단하다. 여기까지 나와서 고생하네. 아주 성실해. 내가 정경 씨만큼 성실하게 하는 사람 못 봤어. 착하고, 요즘 애들 같지 않아. 팀장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돼요. 그런 말도 다 상처 돼요. 내가 무슨 말 했나? 당황스럽네.
말들이 오가는 동안 내 몫의 정식을 차근차근 먹는다. 밑반찬과 국의 건더기도 남기지 않고 비운다. 미소 된장의 작은 알갱이와 후춧가루, 깍두기 양념의 흔적만 남아 있도록 한다. 수저를 받쳤던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면 대화는 끝나 있다. 사람들은 밥을 대충 먹어 놓았다. 일어나실까요, 한 명이 제안하면 다들 돌아간다.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사 들고 회사로 걸어간다.
보도블록이 깔린 도보는 성인 둘이 걸으면 약간 좁은 정도이다. 여자 사원 한 세트, 여자 사원 남자 사원 한 세트, 남자 사원 한 세트, 그리고 내가 맨 뒤에서 걷는다. 여긴 우리만 다니는 일방통행 길이 아니다.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들도 있다. 전봇대와 우체통, 쓰레기 봉지들이 길을 더 좁히기도 한다. 카트 수레를 끄는 할머니가 회사 직원들의 대열 한가운데를 뚫고 나와 내 옆을 스친다. 길 좀 비켜서 걸읍시다. 한 명이 말하고 우리는 두 줄에서 한 줄로 길게 걷는다. 횡단보도가 나오면 다시 뭉친다. 애매하게 섞인 대형으로. 젖은 흙을 손안에서 거칠게 쥐었다 펼치면 생기는 모래섬처럼.
내가 영화였다면, 나는 이런 고독을 계속 곱씹는 사람일 것이다. 나를 혼자 내버려 둘 것이다. 어쩌면 담배를 피울지도 모르겠고, 석재와 각자의 시름으로 서로를 방치하다 싸우며 일순 정적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 말 없고 공허하고 조용한 영화는 분량이 짧다. 그렇게 분량이 짧은 영화도 작년에 십수 편 보았다. 자주 켜던 악기를 팔거나 학교 밖 청소년이거나 카지노 딜러 일을 시작하거나 온 동네의 화분을 깨트리는 강아지가 나오기도 했다. 단상 같은 장면에서 영화들은 끝났다. 나는 계속 진행된다. 시시껄렁하게, 촌스럽게, 뻔한 맛과 멋을 좋아하기도 하면서.
앞서 걷던 매니저님이 정경 씨, 빨리 와, 하고 부른다. 나는 앗, 네, 하고 방긋 웃으면서 간다. 나는 나를 울적한 사람으로 여기지만 어디서는 그렇게 앗, 네, 하고 발랄하게 웃을 줄도 안다. 되도록 그런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만 가끔은 선뜻, 혹은 애써서 외롭게도 비추고 싶다. 아무리 얕더라도 그늘이 있으면 깊어 보인다고 착각들을 하니까.
아르바이트를 이주쯤 나가는 동안, 면접에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곧 구정이고 나는 짐을 챙겨놨다. 연휴를 꽉 채우고 돌아올 것이다. 우선 일 년으로 잡은 알바 기간이 끝나면 본가로 내려갈 수도 있다. 살고 있는 집도 올해까지만 재계약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사이 새로운 일자리나 자신감을 얻게 된다면, 남고 싶은 이유가 생긴다면 발버둥이야 치겠지만 특별히 없다. 석재. 석재를 사랑하지만, 서울의 모든 상한선은 나를 밀어버리는 것 같다. 나는 여전히 바닥이 투명한 스카이 워크에 서 있는 듯하고 아래로는 수풀이 우거지다. 발을 대고 있는 밑이 언제든 마법처럼 사라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꺼트리기 위해 집안을 쓸고 닦거나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내다 버린다. 뜨거운 국물과 밥을 지어 먹는다. 반찬을 양껏 만들어 석재 집에 가져다 놓기도 하고, 한 시간 반을 걸어 사람도 많고 차도 많은 광화문까지 긴 산책을 다녀온다. 그렇게 덮으면서 지내고 있다. 머리를 드는 족족 모서리거나 뾰족하게 날 세운 것들을 다시 눕힌다. 방향을 잘 살펴 가면서.
좋은 일이 있어 식당에 왔다. 벽 한 면에 구십년대 로맨스 영화가 빔으로 쏘아지는 양식집이다. 주문을 마치면 물 한 잔과 식전 크래커를 챙겨 준다. 팥죽색 페인트를 발랐고 조명도 어두워서 슬쩍 섬뜩해 보이지만 의외로 분위기는 따스하다. 가게 한가운데서 타들어 가는 모닥불 장식 때문인 것 같다. 언젠가 참여했던 지자체 백일장에 뽑혔다. 백만 원이 조금 안 되게 상금을 받았다. 적당히 덜어 생활비를 하고 신발 한 켤레를 샀다. 얼마 남지 않은 것으로 적금에 넣고, 석재에게 밥을 사기로 했다.
작은 냄비 안에서 끓고 있는 감자 스튜를 저으며 석재가 말했다. 정경이가 옛날에 물어봤던 거 말이야. 나는 피자 한 조각을 떠 앞접시에 덜었다. 어떤 거? 스튜 안의 떡이 달라붙었는지, 석재는 국자로 바닥을 살살 긁는 데 매진하며 덧붙였다. 오랜만에 친구한테서 연락이 오면 어쩔 거냐고 했잖아. 나는 페퍼로니 조각을 뜯어 먹고 정정했다. 어떻게 할 거냐는 게 아니고 어떻게 생각하냐고 했지. 그리고 그냥 친구 말고 한참 안 만난 친구. 버너 밸브를 조절하며 내가 말했다. 불 줄였으니까 그만 신경 쓰고 빨리 먹어.
우리는 감자 조각과 떡을 조심히 먹었다. 당근과 브로콜리는 입안에서 금세 으깨졌다. 각자 열심히 우물거렸다. 캔 콜라를 유리잔으로 마저 따르며 석재가 말했다. 정경이가 그렇게 말하고 나서 진짜로 연락이 왔다? 그래서 다음 주에 만나. 짱이지. 나는 약간 멍한 얼굴이 되어 듣다가, 비어 있는 석재의 접시에 스튜를 덜어주었다. 근데 너는 별로 안 만나고 싶다고 했잖아, 하고 물었다. 수저에 묻은 크림을 핥아 없앤 석재가 대꾸했다. 안 만나고 싶은 건 아니고, 별로 궁금하지 않다고 했지. 그립지는 않다고. 왜냐면 난 지금이 좋으니까. 나는 어쩐지 신경이 거슬려진다. 조금 날을 세우고 대답한다. 지금이 왜 좋은데? 석재는 아무것도 눈치 못 챈 사람처럼, 정경이랑 있으니까, 한다.
나는 여기서 더 대화를 크게 만들 수 있다. 어렵게 만들 수 있다.
나랑 있는 게 왜 좋은데. 내가 뭔데? 여자친구? 너는 여자친구가 있어서 좋구나. 여자친구가 있으니까 다른 친구들은 안 만나는구나. 왜? 나는 다르다고? 뭐가 다른데. 내가 그냥 여자친구가 아니면 뭔데? 결혼 얘기는 하지 마. 내가 또 화풀이 했다고? 그런데 지금 네 말이 그렇잖아.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나는 석재를 부러워하고 있다. 편하게 다룰 수 있는 석재에게 짜증을 풀고 있다. 그런데 너는 이 관계에서 정말 아무런 잘못이 없어? 매번 나만 너한테 짜증을 내고, 너는 불합리하게 그 화에 얻어맞는 사람일 뿐이야? 이런 말을 나는 하지 않는다.
손을 잡고 식당을 걸어 나온다. 하천에는 왜가리, 백로, 오리들이 둥둥 떠 있고 가끔 풀숲에 고양이가 숨는다. 우리처럼 둘씩 걷는 사람들이 동물을 보고 신기해한다. 어떤 새 종류인지 유추하는 말소리가 들린다. 테이블을 바깥에 내놓고 장사하는 연탄 고깃집에서 회색 연기가 밀려 나온다. 서로를 꼭 껴안고 있는 사람들을 지나간다. 석재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걷지만 우리는 각자의 앞만 보고 있다. 그런데도 사랑을 느끼지. 어떻게 그러지.
버스 정류장 앞에서 석재가 말한다. 내일 출근하기 싫다. 비도 온대. 겨울비 차가운데. 나는 맥없이 대답한다. 그러게. 다른 버스들이 왔다가 승객을 태우고 출발한다. 온열 의자에는 사람들이 꽉 채워 앉아 있다. 우리는 버스 정류장 뒤에 있는 정자로 가 선다. 여름엔 여기가 사람들로 채워질 것이다. 석재가 묻는다. 오늘 자고 갈래? 나는 뾰로통하게 대답한다. 왜 맨날 내가 자고 가냐? 이번엔 네가 자고 가라. 석재는 그냥 웃기만 한다.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집으로 실려 가는 내내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여전히 앞을, 가끔 창가를,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사는 곳이 종점이기 때문에 버스는 점점 넓어진다. 나는 석재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어버린다. 아주 잠깐이라도.
공동현관 앞에서 석재를 보낸다. 현관 잠금을 단단히 하고 씻는다. 석재에게 받아 온 건망고 몇 조각을 덜어 책상 앞으로 간다. 스킨로션도 챙겨 바르고, 손바닥만 한 마사지 기구로 어깨와 턱선을 누른다. 석재와 있는 동안 쌓인 연락을 미리보기로 읽고 내버려둔다. 석재는 이제야 자기 집으로 가는 버스에 탄다. 조심히 가라고 문자를 보낸다. 멍하니 책상 위로 손가락을 두드리다가 형사 드라마를 켰다. 석재 집에서 끊긴 장면부터 그대로 송출되었다. 이 장면에서 형사는 정혼자를 잃는다. 형사가 내막에 가까이 다가서는 동안 범인도 형사를 부지런히 공부하고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넘어지고 유리 조각에 찔려 고통스러워하는 이 장면이 싫어서 매번 지나가는 편인데, 오늘은 그냥 보았다. 징그럽고 힘들었지만 어쩐지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앉은 채로 가만 응시했다. 친구에게는 답신을 보내지 않았다. 읽고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아주 오래 연락이 닿지 않았던 친구를 어떻게 생각해?
나는 좀 보고 싶어 하면 좋겠어. 많은 얘기를 들려줄 수 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