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울렁울렁 과자파티, 마은아
울렁울렁 과자파티 내가 식탁에 앉자, 엄마가 흰 우유를 한 컵 따라서 건넸다. 나는 컵을 왼쪽으로 밀고 단팥빵 포장지를 뜯었다. “아침에 우유 먹으면 속 울렁거려.” 나는 우유가 싫었다. 비린데다 마시면 속이 울렁거리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줬다. “엄마가 크게 한 모금 마셨어. 그러니까 이건 다 마셔.” …
울렁울렁 과자파티 내가 식탁에 앉자, 엄마가 흰 우유를 한 컵 따라서 건넸다. 나는 컵을 왼쪽으로 밀고 단팥빵 포장지를 뜯었다. “아침에 우유 먹으면 속 울렁거려.” 나는 우유가 싫었다. 비린데다 마시면 속이 울렁거리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줬다. “엄마가 크게 한 모금 마셨어. 그러니까 이건 다 마셔.” …
선잠 찬 공기가 이불을 뚫고 들어와 피부를 찌르는 탓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더위가 가신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집 안이 서늘했다. 소설이다. 24절기를 전부 아는 건 아니지만 소설만큼은 제대로 알아챘다. 소설은 얼음이 얼기 시작하는, 비로소 겨울임을 알려주는 절기니까. 눈이라도 쌓인 것처럼 몸이 무겁고 잠이 쏟아졌다. 이럴 때면 겨울잠을 잘 …
중독 잠이 안 올 때는 시끄러운 힙합을 틀고 눈을 감아 볼륨은 2 정도가 적당하고 영원을 외치는 랩 가사와 가끔 사랑을 노래하는 목소리 내가 널 사랑하고 네가 날 떠났대 어쩌면 반대일지도 모르고 그림자가 드리운 방 랩 하나가 끝났는데 지금 시간은 새벽 세 시 …
사이버 레메게톤* 솔로몬의 72 악마를 아십니까 바사고(Vassago) 그것은 내 컴퓨터 아이디 오래전부터 변하지 않는 내 닉네임 중학교 3학년 때 검은색 글자로 적힌 소설 한 장 바사고는 솔로몬을 도와 악마를 봉인하다 마지막에 죽어 버렸다 이젠 살아 있지도 않은 게 단어에게 …
색연필 불행이 어떤 맛과 향일지 생각해 본 적 있니 신년을 맞아 부러진 색연필을 깎았다 마음이 머무를 때 사라져 갈 용도 어릴 적 미술 학원에서 배운 유일한 것 미끄럽게 지나가는 커터날 도려냄 튀는 심 가장 작은 폭죽 묘사가 좋지만 왠지 얕았던 시집은 …
5월의 잼 5월에는 닫힌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다 나는 주술 대신 잼을 끓이며 기다렸다 어린 잔디로 엮은 벽은 바스라질 기미가 없었고 간절한 건 전부 넣자 심장은 가차 없이 끈적해졌다 목젖을 두드린 초여름 습기는 상한 방향제처럼 창문을 열게 했다 고개를 내밀수록 살갗으로 엉겨 붙는 잼 졸아들면 느릿하게 올라오는 기포들 하나씩 터지며 지독한 …
마지막 인사를 마무리하며 진이는 새벽마다 재미도 없는 강연 프로그램을 틀었다. 강연 프로그램이 나오지 않는 날이면 다큐멘터리나 교양 프로그램이라도 봤다. 9년을 같이 사는 동안 매일 그랬다. 죽음을 세 가지로 나눈다면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요. 죽음의 종류를 생각하는 것보다 강사를 바라보는 방청객들의 표정을 보는 게 더 흥미로웠다. 눈을 끔뻑이기만 하는 사람이 있고 시선을 피하는 사람이 있고 진지하게 …
취급 주의 편의점 입구 근처에 쭈그려 담뱃갑을 손바닥에 탁탁 털었다.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곧 회색 후드티를 입은 여학생이 편의점 문을 세게 밀며 뛰쳐나올 것이다. 오늘은 반 이상은 피웠을 때 나왔으면 좋겠다. 입을 벌리자 입김과 담배 연기가 섞여 눈앞을 뿌옇게 만들었다. 연기를 몇 번 정도 들이켰을까, 문 너머에서 빠르게 걸어오는 소리가 …
아, 나는 왜 갈라파고스 이구 <빠른 진행 속도> 피부과에 가야 할지 정신과에 가야 할지 고민을 하다가 결국에는 무난한 가정의학과에 왔다. 접수를 하려고 하자 간호사가 어디가 불편해서 왔는지 물었다. 나는 또 고민을 하다가 온몸이 아프다고 말했다. 간호사는 내 말을 듣고 독감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소파에 앉아서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다. 나는 회색의 네모난 코듀로이 소파에 앉아서 머릿속으로 …
아, 나는 왜 갈라파고스 이구 <빠른 진행 속도> 피부과에 가야 할지 정신과에 가야 할지 고민을 하다가 결국에는 무난한 가정의학과에 왔다. 접수를 하려고 하자 간호사가 어디가 불편해서 왔는지 물었다. 나는 또 고민을 하다가 온몸이 아프다고 말했다. 간호사는 내 말을 듣고 독감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소파에 앉아서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다. 나는 회색의 네모난 코듀로이 소파에 앉아서 머릿속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