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치타 주스를 마시면, 추현서
치타 주스를 마시면 또 꼴찌를 했다. 달리기하다 넘어진 이후로 나는 또 넘어질까 두려워 제대로 뛰지를 못했다. 준우는 아이들을 뒤에 두고 내 앞에 섰다. 그리고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이성민 꼴찌 했대요. 또 꼴찌 했대요.” “공부 잘하면 뭐 하냐? 맨날 달리기 꼴찌하고 넘어지는데.” 음을 맞춰서 너나 할 것 없이 나를 놀리는 소리에 그만 울음이 터졌다. …
치타 주스를 마시면 또 꼴찌를 했다. 달리기하다 넘어진 이후로 나는 또 넘어질까 두려워 제대로 뛰지를 못했다. 준우는 아이들을 뒤에 두고 내 앞에 섰다. 그리고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이성민 꼴찌 했대요. 또 꼴찌 했대요.” “공부 잘하면 뭐 하냐? 맨날 달리기 꼴찌하고 넘어지는데.” 음을 맞춰서 너나 할 것 없이 나를 놀리는 소리에 그만 울음이 터졌다. …
사촌 사촌이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초록색 방수 페인트가 칠해진 옥상 바닥에 고추들과 너부러져 햇빛을 받던 얼굴이었다 폭이 좁은 욕조에 함께 몸을 욱여넣을 때 맞닿았던 무릎이 간지러웠다 오른 쪽, 왼 쪽을 번갈아 긁어내며 이름을 발음할 때 혀가 말리는 모양에 대해 생각했다 어릴 적 개울에서 잡은 가재가 떠올랐고 가재는 몸이 둥그렇게 말린 채로 불투명한 페트병 바닥을 이리저리 …
불씨들 막바지에 이른 것들은 언제나 아름다워. 누군가 그렇게 말했고 곧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옥상 난간은 개미 떼처럼 몰린 사람들로 가득했다. 가장 뒤에 서 있는 건 나뿐이었다. 나는 수천 개의 불씨가 추락하는 진풍경을 미묘한 눈동자로 훑고 있었다. 파티는 한창이었다. 회사 옥상은 퇴근도 마다하고 모인 직원들로 북적거렸다. 100평 남짓한 공간이었음에도 편히 발을 딛기엔 무리가 있었다. 난간은 곳곳에 생화로 …
선명 시계방은 난로의 열기로 후덥지근했다. 나는 패딩을 벗어 밖에서 묻은 빗물을 털었다. 네이비색 장우산을 내려둔 바닥은 금세 흥건해졌다. 유리 쇼케이스 위에 패딩과 케이크 박스를 올렸다. 은영은 시계방 구석 오렌지빛 리넨 소파에 누워있었다. 나는 은영의 어깨를 흔들어 은영을 깨웠다. 은영이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하며 일어났다. “어, 최세진 왔냐.” “가게 문 열고 잠들어도 돼? 여기 금은방이랑 연결돼 있잖아.” …
용서하지 않는다는 건 매일 밤 가시가 그득한 선인장을 손에 쥐는 것과 같다 나는 매일 밤 가시가 그득하게 자란 선인장을 손에 쥔다 가시가 손가락과 손바닥에 촘촘히 깊게 박혀서는 선인장과 이별하듯 헤어져 내 손 안에서 인사한다 따갑고, 조금 매운 것도 같아 통각은 뜨거우면서도 차가운 거니까 가시가 박힌 손을 말아쥐면 이불 속에 있는 발바닥의 각질 가루까지도 징그럽게 불어나는 …
[시] 용서하지 않는다는 건 매일 밤 가시가 그득한 선인장을 손에 쥐는 것과 같다 외 2편, 최다빈 더 보기 »
ROBY 소포가 도착한 건 로바이를 버린 날로부터 4개월가량이 지난 오늘이었다. 받는 이를 쓰는 칸에는 K헌터라는 닉네임이 이름 대신 정갈한 필체로 쓰여 있었다. K헌터 귀하. 어쩐지 우스워 실없는 웃음이 흘렀다. 장난스럽다 못해 가볍기까지 한 닉네임에 높임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K헌터는 고스트 헌터라는 직업을 가진 그가 자신의 주 수입원인 동영상 플랫폼에서 5년간 사용하던 닉네임이었다. 웃음이 서서히 멎어가면 턱을 …
안녕, 루이 “로봇은 인간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로봇은 감정 없는 빈 깡통과 같죠.” “그것도 이제 옛말입니다. 로봇도 다 표현하고 느낄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지가 언제인데요.” “하지만 그것도 결국 인간의 주입일 뿐이죠. 로봇이 인간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건 큰 착각입니다.” 자리를 잘못 골랐다. 식당 안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티브이 소리가 내 머리 위에서 …
도심의 다과회 뿔을 반으로 잘라 책상에 두고 온 사슴이 사람들의 손에 있는 쿠키의 나머지 반쪽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슴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산책로를 유유히 걸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잔디밭의 사인용 테이블에 앉아있다 오동통한 쿠키가 각자의 손에 들려있다 사슴은 빈틈을 노리고 있었다 유쾌한 농담으로 가벼워질 손목을 영락없이 쿠키를 집어 들 손가락을 아니면 쿠키를? 우리는 사슴을 쳐다보았다 사슴은 우리를 …
가을 위의 여자 두물머리 변두리에 앉아 낙엽을 주워다 푸르스름한 살냄새를 맡는다 젖은 줄기 사이로 지문처럼 박힌 자줏빛 반점의 이름을 묻고 싶다 늦가을이면 있다 나를 두고 늙어가는 가죽 그 여자 앳된 청춘을 지나쳐 가을 위로 내려앉은 여자 지금도 단풍나무 발치로 멍든 살점을 태연하게 밀어내며 옷 벗은 가지처럼 희끗희끗한 하루를 보내는 살갗 아래 여름이 고여있을 것이다 이곳의 …
수마트라* 수족관엔 퉁퉁 불은 얼룩말의 살점이 부유浮游했다 내가 싫어서, 꼬리부터 뜯어 먹었다 어쩌면 피일지도 모를 액체가 수족관의 물로 기능할 때까지 한 입은 검은 살점을, 또 두 입엔 하얀 살점을 몸통은 맛이 달랐다 이제야 둥글게 만든 몸으로 누군가와 하나의 기포를 들이마실 때, 건져졌다 한겨울 뜨거운 콘크리트 바닥 위로, 삼백 개의 알을 낳았다 주름진 비늘과 꼬리 없이 …